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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완도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0:22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714

<전쟁 전 피해>

 

완도지역에서는 전쟁 전부터 경찰의 집회 탄압과 청치적 충돌과정에서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했다.

신지면에서는 1947년 5월 1일 메이데이 집회에 참석하려던 신지면 주민 500여 명이 신지면 가인리 모래사장에 집결하여 행진하던 중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했다. 1년 뒤인 1948년 5월 10일에는 완도읍 박윤기 등 9명의 주민들이 생일면 유촌리 해안가에서 경찰에 사살되었으며, 1949년 2월 5일에는 완도경찰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완도읍 개머리 끝에서 경찰에 사살되었다. 1949년 봄에는 삼산면 구림리에 진입한 해남경찰에 의해 문경수가 살해당했으며, 얼마 후 다시 경찰이 그의 집과 제각에 불을 지르고 일가족을 학살했다. 1949년 9월 23일에는 전남도경으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나주시 남평읍 부근 하천에서 총살당했다. 한편, 경찰은 주민들을 대규모로 연행했다. 1947년 집회에 참가했던 주민들은 1948년 말에 대규모로 연행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중 15명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1950년 7월 5일 후퇴하던 국군 5사단 15연대에 의해 인근 공동묘지 등에서 총살당했다.

 

완도에서도 거제, 영광, 영암과 같이 1949년에 집중되었던 토벌에 의해 민간인들이 대량으로 피해를 입었다. 1949년 6월 완도경찰서의 대규모 작전에 의해 체포 된 주민들이 신지면 해동리 마을 주변과 곤고지산 등지에서 총살당했다. 이를 ‘산떨이 작전’ 또는 ‘토끼몰이 작전’이라고 불렀다. 1949년 8월 14일경에는 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을 돕기 위해 보리를 걷었던 완도 군외면 주민들이 금당지서나 완도경찰서에 감금된 후 총살당했다. 이를 ‘보리 한 되 사건’이라고 불렀다. 비슷한 시기인 1949년 8월 21일경 소안지서 등 각 지서에 구금 중이던 주민들이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완도지역 각 섬의 국민보도연맹도 소집되어 완도경찰서에 감금되었다. 이들은 7월 17일 완도읍 제1부두에서 한국식량공사 소속의 ‘장영호’에 실려 목포항의 해군에 인계된 뒤 목포시 인근 바다에서 희생되었다. 이어 7월 22일경에는 군내리 김금예 등 20여 명의 주민들이 완도읍 망남리 재에서 집단희생당했으며, 각 지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완도군 내 바다에서 희생되었다. 대한청년단 약산면단장이었던 박씨(박병환)에 의하면, 약산면에서는 40여 명의 주민들이 희생되었는데, 당시 주민들을 연행하는 모습을 보고 ‘설마 죽이기까지야 하겠는가’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나주경찰부대사건>

 

완도경찰서가 7월 24일 금일읍 소랑도로 후퇴한 뒤 다음 날 나주에서 후퇴하던 나주경찰부대가 완도에 진입하여 소위 ‘나주부대’사건을 일으켰다. 나주경찰서의 경찰관 270여 명은 7월 23일 인민군이 광주에 진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후 3시 후퇴를 시작하여 영암, 강진, 장흥, 보성을 거쳐 7월 25일 해남과 완도에 진입했다. 이들은 완도를 통해 해로로 부산까지 후퇴하려 했다고 알려져 있다.

완도지역의 경찰이 후퇴한 사실과 수백명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희생사실을 알고 있었을 나주경찰부대가 경찰신분을 숨긴 채 해남과 완도에 들어와 인민군 행세를 하며 ‘인민군 환영대회’를 개최했다. 당시 나주경찰부대가 해남과 완도경찰의 후퇴사실을 몰랐다면 인민군으로 위장한 나주부대 경찰과 해남 완도경찰 간의 교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전날까지 후퇴하던 경찰에게 가족들을 학살당한 유족들과 주민들이 반신반의하면서 소집되었고, 주민들 소집이 끝나자 변복한 경찰들이 신분을 밝히며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런 수법으로 7월 25일 완도읍 죽청리 주민들이 학살당했으며, 7월 26일에는 완도중학교에 소집된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7월 27일에는 청산면 도청항과 청산국민학교에 모였던 주민들이 희생당했다. 7월 28일에는 소안면 비자리 주민들을 살해했으며, 7월 29일에는 노화읍 이포리 선창가에 모인 주민들을 배남재로 끌고 가 살해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확인한 완도의 희생자 수는 42명이다.

 

국민보도연맹사건과 나주부대사건이 발생한 뒤에도 완도에 대한 인민군의 진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경찰이 완전히 후퇴하던 9월 14일까지 완도지역은 경찰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으며, 이들에 의한 주민피해는 계속되었다.

1950년 8월 20일 경찰병력이 노화읍 부속도서 서넙도에 총을 쏘면서 진입하였다. 이에 놀란 주민들이 동네 야산으로 피신하자 경찰은 3일간 서넙도에 주둔하면서 야산을 수색하여 주민들을 하산토록 하였다. 8월 23일 경찰은 하산한 주민들과 집에서 불려 나온 주민들을 오늘날 서넙도 교회자리로 끌고 가 이중 김양두 등 총 8명을 집단학살하였다. 같은 시기에 이런 연유로 총살당한 노화읍 주민들이 30여 명에 달했다. 나부경찰부대사건에서 살아남았던 화흥리 조남율은 8월 4일, 대신리 이정인, 박종철, 최병희는 8월 17일, 대신리 김선진은 8월 21일 총살당했다. 덕암리 김철금은 1950년 8월 20일경 체포되어 약산지서와 고금지서를 거쳐 완도경찰서로 이송 된 후 1950년 8월 29일경 완도읍 망남리 고개에서 10여 명과 함께 경찰에 사살되었다.

 

완도경찰서는 9월 중순경 완도읍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는데, 이때에도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완도경찰서에 연행되었던 죽청리 주민들은 인민군이 완도를 점령하기 며칠 전인 9월 3일 완도읍 망남리에서 총살당했다. 금당면에서는 1950년 9월 6일 아침, 인민군으로 위장한 경찰이 장흥군 회진 항에서 금당면 가학 항으로 상륙하였다. 이에 놀란 가학리 주민들은 인민군이 상륙한 줄 알고 마을 뒷산으로 도망쳤는데 정병조는 바닷가 쪽으로 도망가다 경찰에 사살된 채 바다로 떠내려갔다. 경찰은 총을 쏘면서 가학리 주민들을 쫓아 금당면 육산리에 도착하였다. 총소리에 놀란 육산리 청년들도 가학리 주민처럼 울포리 금당지서가 있는 쪽으로 도망쳤다. 경찰은 이들을 계속 추격하여 금당지서 못미처 금당면 차우리 현재의 금당교회 밑에서 권육동 등 3명을 사살하였다. 경찰에 체포된 송기복이 탈출하여 이들이 인민군이 아니고 경찰임이 알렸다. 권육동의 조카이자 경찰에 함께 쫓겨 다닌 권용주는 당시 “경찰병력은 50여 명이었고 배 1척을 타고 장흥 회진 쪽에서 가학리로 왔다. 그들은 가학리로 와서 ‘우리는 인민군이다. 놀라지 마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완도읍 당사도 김용인 등 5명도 1950년 9월 10일 완도읍 죽청리 야산에서 총살당했다.

 

완도에서는 1950년 9월 10일 오전 10시, 경찰병력 10여 명이 보길면 정자리에 진입하여 주민들을 마을 입구로 집합시켰다. 경찰이 지방폭도라고 체포한 보길면 정자리 김봉만에게 함께 활동한 사람을 지목하게 하였다. 이에 김봉만이 고인욱, 박일재, 조영철 등 3인을 지목하자 경찰이 이들 4명을 정자리 앞 해안가로 끌고 가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사살하였다.

청산면 부흥리 김갑동은 9월 13일 청산지서로 연행되어 가다가 청산면 읍리 뒤편 큰 재에서 사살되었다. 완도군 청산면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후퇴하지 못한 전남 서남부 경찰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9월 14일 후퇴하던 완도경찰 등 전남 서남부 경찰부대가 완도군 청산도와 여수시 거문도로 후퇴하면서 완도경찰서 유치장에 구금 중이던 20여 명의 주민들을 청산면 앞 바다 선상에서 사살 후 수장시켰다. 청계리 지정대 등 10명의 청산면 주민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청산지서에 구금 중 추자도로 이송되어 9월 15일 추자도 대서리 공동묘지에서 희생되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이 완도지역에 진입한 날은 9월 14일로서 청산면과 일부도서지방을 제외하고 완도군을 점령했다. 이들이 점령하자 인민위원회와 내무서가 설치되었고 후퇴 하지 못한 완도군수 등 지방유지, 군경 가족 수 십 명을 체포하여 완도내무서 유치장에 구금하였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완도 앞 바다를 통과하는 대규모 선단을 보고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인민군 측은 9월 30일 완도 항에서 선편으로 해남군 남창 항으로 후퇴를 시작했는데, 이들은 후퇴 직전 내무서 유치장에 있던 30여 명을 완도읍 제1부두 앞 추섬에 수장시켰다.

<부역혐의 피해>

 

완도경찰서는 7월 22일 완도읍에서 인근 섬으로 후퇴하여 대치했으며 9월 14일 완도읍내에서 완전히 철수하여 청산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중 10월 1일 완도 본도를 수복하였다. 인민군측은 후퇴 하면서 ‘유엔군이 완도로 상륙하면 완도가 불바다가 될 것이다. 경찰이 들어와서 인민군 점령기 때 피난 가지 않은 사람을 죽일 것이다. 그러니 사방 50리 밖으로 피난 나가라’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선무하였다고 한다. 한편, 완도경찰서 연혁사에는 “인공치하에서 부역한 지방좌익분자가 약 2,120명인바, 경찰의 민심계도와 선무공작으로 거의 자수하고, 좌익분자는 철저한 색출로서 발본색원 검거하여 잔여분자는 활동력을 잃고 입산도주 하였다”라고 수복 후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불과 2주일 만에 생긴 부역자에 대한 주장임이 주목된다.

 

복귀한 완도경찰서는 사찰계를 통해 각 지서를 지휘하여 주민들을 연행하였다. 당시 사찰계와 지서주임은 ‘즉결처분권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A급 부역자들은 대부분 관내 지서 인근에서 사살하거나 수장시킨 후 ‘적 사살 몇 명’식으로 본서에 보고하였다. ‘적 사살’이란 표현은 당시 완도군의 상황과 맞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 처벌받은 경찰은 없었다.

완도경찰서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은 완도읍 망남리 재, 죽청리 야산, 대야리 야산 등에서 총살당했다. 완도경찰서는 1950년 10월 17일 피난 갔던 해남에서 고향으로 돌아오던 대신리 김장오를 체포하여 군외면 원동검문소 부근에서 총살했으며, 노화읍 김덕순 등 9명을 1950년 11월 17일 총살했다. 1950년 12월 6일에는 노화읍 대신리 이동진 등을 대신리 다리 밑에서 총살했으며, 1951년 2월 10일에는 죽청리 박상기 등 15명을 대야리에서 총살했다. 1950년 11월 29일에는 금일읍 월송리 농민위원장이었던 이중구를 살해했으며, 소안면 황간도 김준섭을 완도읍 죽청리 뒷산에서 총살했다. 완도경찰서로 이송된 김준섭 등은 1951년 1월 10일 완도읍 죽청리 뒷산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완도경찰서에 한 달 가량 수감되었던 신기면 신상리 김재호는 “경찰서 유치장 하나에 부역자로 끌려 온 사람들이 60~70명 정도 구금되어 있었는데 유치장은 2~3개 정도 있었다. 그렇게 갇혀 있는 동안 경찰이 부역혐의자들을 가려서 야산으로 끌고 가 총살시켰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희생은 완도경찰서 산하 각 지서에 의해서도 저질러졌다.

고금지서는 1950년 10월 15일 상정리 선창가, 10월 18일 봉명리 뒷산, 10월 26일 청학리 뒷개 선착장, 11월 2일 금당면 우도, 11월 3일 세동리 야산, 11월 6일 농상리 백운동 저수지, 11월 8일 세동리 앞산 골짜기에서, 11월 22일 용무골, 1951년 1월 3일 석치리 고금국민학교 뒤, 3월 17일 고금대교 인근 야산, 3월 내동리 산에서 주민들을 총살했다.

군외지서는 1950년 11월 12일 서홍리 소나무 숲, 11월 23일 마을 뒷산, 12월 7일 황진리 왁사구지, 1951년 4월 24일 용계리 야산, 8월 10일 황진리 가장골에서 총살했다.

금당지서는 1950년 10월 20일 차우리 박금동 등 주민들을 세포리 신섬 바다에서 수장했다. 같은 마을 강군수 등은 10월 30일 수장당했다. 전매근은 11월 8일 고문당하던 중 사망하였다. 정형례는 금당지서에 감금되어 조사를 받던 중 11월 23일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가학리 정승근 일가족 4명이 피난 중 잡혀 금당지서로 이송되었다가 박소아 정송기 모자는 11월 7일 울포리 선착장에서 희생당했으며 정승근 정갑례 부녀는 11월 8일 울포 공동묘지에서 희생당했다.

금일지서는 척치리 전평두 등은 감금 중이던 10여명의 주민들을 11월 8일 울포리 공동묘지에서 총살했다. 그리고 척치리 김주생을 완도경찰서로 이송하던 중 살해했다. 금일면에서 5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화지서는 10월 23일 넙도 김영근을 연행하여 타살했으며 11월 8일과 10일 충도리 고홍철 등 4명을 보길면 정자리 산 등에서 살해했다.

생일면에서는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당한 최병오와 최병곤의 모친 금곡리 김표금이 10월 13일 2명의 경찰에게 연행되어 배에 실려 나간 뒤 행방불명되었다.

소안지서는 1950년 10월 31일 이월리 백서주를 완도읍 개머리 끝 바다에서 수장했다. 1950년 11월 중순에는 완도경찰서 소속 경찰관들이 황간도에 진입하여 주민들을 황간국민학교 운동장에 집합시킨 후 부역혐의를 받던 김청석 등 십 여 명을 소안지서로 연행하였다. 소안지서는 11월 14일 김청석을 비자리 소안지서 인근에서 총살했으며, 11월 24일 김병율과 권남복을 황간국민학교 뒷산에서 총살했다. 김인주는 피난처인 해남에서 연행되어 소안지서에서 조사를 받은 후 풀려났으나 다시 연행된 후 수장되었다. 황산국민학교 교사였던 김진보는 전쟁 전 희생된 김남곤의 아들로 경찰에게 체포된 후 조사를 받은 후 이월리 선창가에서 공개 총살당했다. 위 김진보의 사촌 김진학과 아들 김윤수도 소안지서에 감금되었다가 김윤수는 11월 23일 비자리 해안가에서, 김진학은 12월 23일 비자리 삼거리에서 희생당했다. 비자리 김종매는 소안지서에 감금되었다가 12월 27일 비자리 뒷산에서 사망했다. 구도리 신관삼은 소안지서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던 중 1951년 2월 24일 고문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신지지서는 신지면 양곡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 70여 명 중 31명을 완도읍 작은 개머리 끝에서 수장했으며 40여 명은 완도읍으로 갔다. 당시 학살 현장에서 생존한 박완규는 “학교에서 체포되어 신지 농협창고에 11일 정도 감금되어 있으면서 부역혐의를 자백하라는 고문을 받았다. 어느 날 아침 경찰이 구금 중이던 31명의 손을 묶고 나머지 40여 명은 묶지 않고 신지면 명사십리 선착장에 대기시켰다. 우리는 완도경찰서로 이송되는 줄 알았으나 완도경찰서 경비선이 우리를 싣고 완도읍 작은 개머리 끝으로 가서 수장시켰다. 사람들을 줄에 연이어 묶은 채, 바다에 밀어 넣자 줄줄이 쭉 물속으로 빠졌다. 나는 맨 마지막이었는데 손을 묶었던 줄이 풀려 있어서 헤엄쳐서 살았다. 손이 묶이지 않은 사람 40여 명은 배에 실려 완도읍 쪽으로 갔다”라고 하였다. 신지지서는 9월 12일 최세용의 처 김권례를 신상리 뒷산에서 살해했으며 11월 19일 같은 마을 김대호, 신영복을 대평리 저수지 근처에서 살해했다. 10월 30일에는 신상리 김영진을 약산면 상득암리 마당골에서 살해했다. 김영태와 조장열은 토굴에 은신 중 신지지서에 체포되어 12월 19일 양천리 공동묘지와 월부리 우물가에서 각각 희생당했다. 같은 마을 이정임은 고금면으로 피난 갔다가 12월 16일 고금면 항동리 밭에서 희생당했다. 월양리 박옥금은 신지시서로 끌려가던 중 11월 21일 신지면 독구재에서 희생당했다.

약산지서는 주민들을 약산수협 뒷산, 해동리 곤고지산, 장용리 앞바다 등에서 살해했다. 10월 5일 약산지서 경찰이 배를 타고 강진군 마량면 쪽으로 피난을 가던 넙고리 주민들을 발견하고 고금면 초완도 해상 사살하여 바다에 수장하였다. 약산지서는 10월 30일 약산면 자위대장이라며 약산지서에 감금되어 있었던 해동리 김찬규를, 11월 22일에는 우두리 최기근과 성태순을 약산수협 뒷산에서 살해했다. 10월 30일 해동리 신대인을 마을회관에 구금했다가 해동리 곤고지산에서 살해했다. 약산지서에 감금되었던 해동리 권길용, 권광선, 분주소원이었던 득암리 임남효를 11월 27일 다른 주민 5~6명과 함께 해동리 곤고지산에서 살해했다. 11월 29일 해동리 박형수를, 11월 30일 관산리 신관용을 장용리 앞바다에서 살해했다. 장용리 정오균은 다른 주민들과 함께 완도 앞바다에서 수장되었다. 득암리 농민위원장이었던 임채복은 강진군 마량면에서 배를 타려다가 체포되어 박옥규, 배도연, 장준연, 장해익 등과 함께 마량면에서 희생당했다. 가사리 황장임은 경찰관 부인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1951년 2월 23일 가사리에서 희생당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7. 5. 1.

가인리 모래사장

2

경찰

전쟁 전

1948. 5. 10.

유촌리 해안가

9

경찰

전쟁 전

1949. 2. 5.

완도읍 개머리 끝

완도경찰서

전쟁 전

1949. 6.

곤고지산 등

경찰토벌대

산떨이 작전

전쟁 전

1949. 8. 14.

금당지서 등

완도경찰서

보리 한 되 사건

전쟁 전

1949. 8. 21.

소안면

수십

소안지서

형무소

1950. 7. 5.

전주형무소 공동묘지

15

5사단

전주형무소

보도연맹

1950. 7. 17.~22.

목포 바다, 망남리 재

완도경찰서

소개

1950. 7. 25.~29.

죽청리 등

42

나주경찰부대

소개

1950. 8. 4.~29.

서넙도 등

30

완도경찰서

소개

1950. 9. 3.~14.

완도읍 망남리 등

30

완도경찰서

인공

1950. 9. 30.

추섬

30

완도내무서

부역

1950. 10.~1951.

죽청리 야산 등

완도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