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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영광지역사건 종합

2013.07.24 22:59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588

<전쟁 전 피해>

 

영광에서는 1946년 10월 시위군중 12명이 사망했다.

1949년 국군의 토벌작전이 영광지역에도 있었는데, 주민들의 피해는 5월과 9월에 집중되었다.(거제 외) 5월 9일 영광 와룡리에 진입한 토벌 국군(5사단?)은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이중 3명을 공개 사살했으며, 9월 13일에는 영광 법성면 진내리 주민 33명을 영광경찰서로 연행한 후 고창군 고수면 부곡리 ‘마당바위’에서 집단학살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나자 영광경찰서는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여 감금했다. 이들 주민들은 1950년 7월 10일 경 영광군 군남면 검덕산과 1950년 7월 12일 경 영광읍 입석리(연성리) 깃봉재에서 희생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 용역조사인 『피해자 현황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영광군 보도연맹원들은 군남면 용암리, 영광읍 단주리 사자등, 고창군 공음면 용성리 마당바위, 법성면 법성리에서도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영광군 보도연맹 사건 관련 희생자 수는 최소 72명으로 확인하였다. 한편, 경찰서 근무자 김씨(김창종)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100명에서 200여명 사이의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이 외에도 7월 중순 월산리, 화천리 보도연맹원 등 40여 명의 주민들이 화천리 석장마을에서 집단희생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영광경찰서는 전남지역 대부분의 경찰서와 같이 7월 23일에 후퇴하였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주민피해는 인민군이 후퇴하던 시기에도 발생했다. 영광에서는 1950년 9월 28일 영광읍 금융조합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 다수가 입석리 신대 야산등에서 학살당했다고 한다.

백수면 당위원장 최00 판결문에 의하면 백수면 당위원회는 9월 28일 도피했다가 10월 3일 돌아와 백수면 유격대를 조직하여 10월 3일부터 30일까지 최소 176명을 살해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 있어 정작 도피시기에는 학살이 없었는데, 이는 매우 특이한 현상으로 국군 수복 후에 발생한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에서 생기는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백수면의 사건은 사건 발생일을 놓고 볼 때, 앞의 영광읍 금융조합창고 사건과 또 다름을 알 수 있다. 한편, 염산면에서도 같은 시기인 10월에 피해가 가장 많았다.

영광지역에서는 국군의 수복과정이 없어서인지 희생자의 성격이 뒤바뀐 경우도 있다. 1951년 1월 21일 아침 피난을 떠난 오길종 일가족이 경찰의 공격을 받아 오길종 등 3명이 희생되었다. 인민군 측 학살사건을 정리하고 있는 공보처의 「피살자 명부」에는 오길종(32)이 1950년 10월 28일 백수면에서, 박양옥(25)이 연성리에서 좌익에게 피살된 것으로 기재돼 있다.

영광지역은 불갑산 사건의 경우를 제외하면 주로 경찰에 의한 피해가 많았던 지역이었다.

 

<토벌 피해>

 

영광경찰서는 1951년 1월 6일 토벌부대에 의해 연행된 주민 30여 명을 ‘북문재’에서 총살했다. 이 중에는 1951년 1월 4일 대산면 춘산리에 연행된 강금동 등 6명의 주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군남면에서는 1950년 11월 28일 남창리 주민 6명이 지서 경찰에게 희생되었으며, 12월 12일에는 오동리 주민 빈성채가 경찰의 군유산 토벌작전(영광 함평 합동작전)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월암산 계곡인 속칭 ‘먹골’로 피난 갔다가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이후 1951년 1월 중순경에는 만삭임산부였던 문제성의 처 김씨가 용암리 입구 논두렁에서 총살당했으며 한 달 후인 2월 17일에는 대창국민학교로 소집되어 조사를 받은 후 문제성 등이 지서로 끌려가 함께 총살당했다. 2월 20일에는 도장리 류희령이 ‘불갑산 대보름 작전’ 중인 경찰에게 사살당했다.

군서면에서는 1950년 11월 12일 남죽리 김묘례 모녀가 경찰토벌대를 피해 시댁이 있는 만금리로 갔는데 이를 쫒아 온 경찰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 당시 김묘례는 업고 있던 돌도 안 된 젖먹이 딸과 함께 희생당한 것이었다. 11월 19일에는 새벽에 영광경찰서 경찰관들이 착검한 총을 들고 군서면 녹사리 월곡마을을 집집마다 수색하였다. 집에 있던 주민들은 모두 우물가로 집결당했다. 경찰은 이들 중 최정희와 박씨 일가 등 주민 10여 명을 끌고 가 영광면 선창가 언덕에서 총살했다. 영광경찰서 군서지서에 근무했던 임씨(임종필)에 따르면, 월곡마을 사건은 지서차원이 아니라 경찰서 기동대 차원에서 했을 것이라고 한다. 1950년 12월 2일에는 아침 7시 삼효리 흑석마을에 진입한 경찰 20여 명이 피난하지 못하고 마을에 남아있던 노인과 여성, 어린이 30여 명을 마을 앞 정자로 집결시켰고, 얼마 후 인근 야산에 숨어있던 10여 명의 주민을 잡아 같은 장소로 왔으며, 이중 10여 명을 석전마을로 가서 총살했다. 3일 뒤인 12월 5일 미산마을 김신형 등 15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홍곡저수지 옆 산 ‘막바대’ 등에서 총살되었다. 1951년 2월 8일 오전 불에 타고 남은 주막집에 남아 있던 송림리 김대복, 김원복 등 3명 등이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이 외에 군서면에서 300여 명의 주민들이 학살당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영광경찰서 의경이었던 조씨(조성팔, 23세)는 군서면 갈매에서 경찰이 사살한 300구 정도의 시체가 밭에 널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하였다.

대마면에서는 1950년 12월 1일 화평리에 진입한 경찰이 주민들을 소집하여 이중 6명을 마을입구에 있는 부성재에 잡아놓고 있었다. 이 때 앞을 지나던 이인섭이 경찰에게 사살당했다. 1951년 1월 6일에는 대마지서 경찰이 정부금, 김순여 외 1명을 대마 중학교 앞산에서 총살했다.

묘량면에서는 1950년 11월 30일 영광경찰이 묘량면 삼효리 효동마을에 들어와 묘량서초등학교에서 교무회의를 하던 4명의 교사를 냇가에서 사살했다. 1950년 12월에는 묘량면 삼학리 주민 김영준이 마을주민들과 연암리 연정재로 피난 갔다가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1950년 12월경 부락에 있으면 죽는다는 소문이 나자 삼학리 주민 대부분이 연암리 연정골로 피난했다. 사흘 후 경찰이 연정골로 몰려와 피난민들을 다시 삼학리로 끌고 내려왔으며, 이 과정에서 삼학리 주민 10여 명과 함평군 월암리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백수면 주민들은 12월 중순 이후 경찰 토벌작전이 본격화되면서 갓봉 쪽으로 피난하였다. 그런데 1950년 12월 24일 백수면 지산리 이민마을에 진입한 경찰에 의해 피난하지 못하고 집에 남아 있던 최길수 등 20여 명의 주민들이 총살당했다. 12월 28일에도 영광 경찰이 백수면 토벌작전을 펴면서 구수리 마을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소개시켰다. 그러나 많은 주민들이 이주하지 못하고 움막을 짓고 마을에서 생활해야 했다. 12월 31일 새벽 경찰은 다시 백수면 천정리와 길용리를 포위하였다. 경찰들이 온 것을 알고 뒤늦게 피신하려던 주민들이 경찰에 붙잡혀 총살되었다. 이날 천정리 대흥마을, 천기마을, 자룡재, 길용리에서 13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은 강씨(강용옥, 당시 12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그날 새벽 경찰들이 방문을 열어 제치며 ‘나와 개새끼들아!’ 하고 소리쳤다. 가족들이 놀라 마당으로 나가자마자 아버지와 외삼촌, 누나, 남동생에게 마구 총을 쏘아 사망하였다. 그날 총소리에 놀라서 우리 집으로 피난 왔던 천정리 주민 2명(김점례, 전대자)도 총을 맞았는데 여자는 어린애를 업고 있었다. 이어 경찰이 집에 불을 질렀다. 어머니는 어깨에 총상을 입고 산으로 도망쳐 살았고, 나는 집안에 있다가 여동생(강귀모)을 업고 불 속에서 뛰어 나와 산으로 도망쳐 살아났다“라고 했다. 이외에도 1950년 12월 31일 이관열․이관식 형제는 경찰이 마을에 불을 지르자 처가 동네인 법성포로 가다가 경찰에게 붙잡혔다. 경찰은 이들에게 길을 안내하라며 데리고 다니다가 법성포 맞은 편 한시령에서 사살했다. 1951년 1월 20일 갓봉 부근의 백수면 장산리에서는 피난하지 못하고 집에 있던 주민 10여 명이 새벽에 들이닥친 경찰에 붙잡혀 무차별 사살되었다. 같은 날 오전 천정리 대흥마을에 들어온 경찰은 주민들을 마을입구 ‘막거리’에 집결시켰으며 경찰 10여 명이 마을을 포위하며 가가호호를 수색했다. 이어 마을 주민들의 소 3마리를 경찰 주둔지로 끌고 가게 한 후 주민 한 명씩 불러내 죽이기 시작했다. 같은 날 경찰은 천마리 인근 야산에 피신해 있던 주민들을 붙잡아 사살했다.

1951년 1월 21일 아침에 함께 피난길에 나섰던 오길종 가족 등 3명이 사살당했다.「피살자 명부」에 영광읍 남천리 거주자 오길종(32)이 1950년 10월 28일 백수면에서, 박양옥(25)이 연성리에서 좌익에게 피살된 것으로 기재돼 있으나 경찰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1951년 3월 12일 법성지서 경찰들이 백수면 구수리 모래미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모두 집결시켜 최동준, 한광수 등 6명을 사살했다. 「한국경찰대 적 동향 일일보고서」(1951. 3. 17. 영광경찰서 보고)에는 “1951년 3월 12일 오후 4시, 3월 11일 군유산 작전 동안 흩어졌던 적들이 3월 12일 오후 4시경 도주하는 것을 뒤쫓았다. 선평리로 적들을 추격하여 지금까지 적 115명을 죽이고 32명을 사로잡았다.(후략)…”는 기록이 있어 영광 경찰이 3월 11일~12일 대대적인 작전을 펼친 사실이 확인되었다. 당시 구수리가 법성면 생활권으로서 경찰이 법성면에 먼저 진주하여 백수면 수복작전을 벌이던 시기였으므로 법성지서의 경찰이 구수리 사건의 가해자로 판단되었다. 1951년 3월 11일 아침 염산면과 군서면 쪽에서 경찰들이 밀려오자 백수면 상사리․하사리․지산리 주민들은 속칭 ‘터진개다리’ 쪽으로 몰려갔다. 이 다리를 건너야 갓봉이나 칠산바다 쪽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주민들이 쫓아온 경찰에게 잡혀 터진개다리 부근에서 사살되었고, 일부는 백수남국민학교로 연행된 후 죽임을 당했다. 경찰은 백수남국민학교로 몰고 가 학교에 가두었는데, 이중 강명수 등 남자 17명을 뽑아내 운동장에서 총살하였다. 당시 운동장에는 백수면 뿐 아니라 염산면에서도 끌려 온 사람들이 많았다. 경찰이 교실에 남은 사람까지 죽이려고 중기관총을 설치하고 있을 때 한청단장인 박남도가 ‘어린애들하고 부녀자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고 하여 학살이 중지되었다. 한편 이날 칠산바다로 피난 간 사람 중에서는 강추위 속에 토벌대를 피해 도망치다가 바닷물에서 얼어 죽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법성면에 진입한 경찰은 1951년 1월 22일 법성면 용덕리 신계마을을 포위하고 수색하면서 주민들을 ‘진부재’로 집결시켰다. 당시 30여 명의 주민들이 모였는데 경찰은 이중 노인과 아이들을 풀어주었으며 김용조 등 청년 4명을 뽑아내 총살했다.

불갑면에서는 1950년 11월 8일 새벽 부춘리에 진입한 경찰이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김영근, 김순덕 등 10여 명을 사살했다. 11월 17일에는 녹산리 갈록마을 주민 류희태가 도로복구 작업을 독려하던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염산면에서는 1951년 2월 2일경 염산면 신성리 주민 김길선이 군남지서 경찰에 붙잡혀 희생되었다.

홍농면에서는 1951년 1월 8일 새벽 영광 경찰이 홍농면 상하리 하봉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마을 앞 논으로 집결시켰다. 경찰이 ‘인민반장 한 사람 손들라’면서 좌익 활동한 사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주민들의 얼굴을 보면서 ‘넌 뭣했나?’ 하면서 무조건 두들겨 팼다. 이어 주민들을 끌어내 한 사람씩 총살했다. 여기서 하종제 등 6명이 희생되었다.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 하종철 등이 경찰에 붙잡혀 총살되었다.

1951년 2월 5일에는 영광군 홍농면 항고지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고창군 무장면 월림리 죽림마을 김은택이 진입하던 경찰을 피해 산으로 피신 갔다가 희생되었다.

1951년 3월 13일에는 법성면 용성리 주민인 나석주(당시 35세)는 처가인 홍농면 월암리 풍암마을로 피난하여 살다가 군경에게 사살되었다. 1951년 3월 15일에는 홍농면 월암리 주민 이일규가 피신 중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소문난 부호이기도 한 그는 일제 강점기 31세의 나이로 홍농면장을 지냈다고 한다.

영광읍에서는 1951년 4월 5일 단주리 집에 와 숨어있던 나규봉이 덕호출장소(덕흥리) 경찰에게 붙들려 간 후 영광-군서간 도로에서 살해당했다.

영광경찰서 대마지서에 근무했던 강씨는 토벌작전이 매일 있다시피 하여 대마면을 비롯하여 불갑, 묘량, 백수면 등 수천 명은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영광경찰서 의경 조씨(조성팔)은 갓봉작전 때 이불지고 피난 온 15세가량의 소녀를 동료경찰이 쏘아 죽이는 것을 보았으며, 한청단원이 경찰들과 함께 토벌 다니며 부역자를 지목하는 일이 많았고 하는데, 갓봉작전에 대한 경찰보고에 적 115명을 죽이고 쌀 20가마를 노획하였다는 보고는 과장된 것이라고 증언하였다.

영광지역에서는 경찰의 토벌사건 외에 11사단 토벌작전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도 확인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11사단 사건은 불갑면 금계리, 묘량면 연암리에서 발생한 것이다. 1950년 10월 30일 불갑면 금계리에서 피난하던 주민이 20연대 국군에게 살해당했으며, 12월 12일 함평 해보면에 주둔하던 20연대 5중대가 산골마을이었던 영광 묘량면 연암리 연정마을에 진입하여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에서 함평에서 피신한 월야면 예덕리 주민 6명이 희생당했다. 당시 연암리 주민들의 피해도 컸을 것으로 예상되나 현재 마을이 없어져 더 이상의 피해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6. 10.

12

10월 항쟁

전쟁 전

1949. 5.~9.

고창 마당바위 등

36

국군

보도연맹

1950. 7. 10.~12.

검덕산, 깃봉재 등

100~200

영광경찰서

인공

1950. 9. 28.

입석리 신대 야산

토벌

1950. 10. 30.

불갑면 금계리

11사단

피난민

토벌

1950. 11. 8.

불갑면 부춘리

10

경찰토벌대

토벌

1950. 11. 19.

영광면 선창가 언덕

10

경찰토벌대

토벌

1950. 12. 2.~5.

삼효리 석전마을 등

25

경찰토벌대

토벌

1950. 12. 12.

묘량면 연암리

11사단

함평 피난민 등

토벌

1950. 12. 24.~31.

지산리, 천정리 등

40

경찰토벌대

토벌

1951. 1. 6.

북문재

30

경찰토벌대

토벌

1951. 1. 8.

홍농면 상하리

7

경찰토벌대

토벌

1951. 1. 20.~21.

백수면 장산리 등

20

경찰토벌대

토벌

1951. 1. 22.

용덕리 진부재

4

경찰토벌대

토벌

1951. 3. 11.

터진개 등

38

경찰토벌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