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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목포지역사건 종합

2013.07.24 22:34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610

<전쟁 전 피해>

 

목포에서는 1948년 12월 5일 목포경찰서에 끌려갔던 백경조 등 6명의 주민들이 목포대학교 운동장에서 총살당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목포에서 가장 먼저 희생된 민간인들은 목포형무소에 수용되었던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었다. 특히 국민보도연맹원들은 목포지역뿐 아니라 무안, 함평 등 인근지역에서 끌려온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경찰 후퇴 전날인 1950년 7월 23일 전남도경 경비선 ‘금강호’에 실려 신안군 비금면 인근 해상에서 수장되었다. 이 사실은 목포경찰서 사찰계 승씨(승호) 등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목포경찰서 수사계 근무자 정씨(정용일)에 의하면, 해군기지사령부, CIC, 목포경찰서가 합동으로 학살에 가담했는데, 목포경찰서 소속 경찰이 직접 총살에 가담했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형무소 간수부장이었던 이씨(이은형)의 목격담에 따르면, 당시 수감된 주민들은 징역을 살 줄 알았을 뿐 처형당할지는 몰랐으며, 당시 형무소는 포화상태로 보도연맹원을 수용할 공간이 없었으므로 끌려 온 당일 밤 실려 나가 희생되었다고 한다.

증언과 자료에 의해 목포형무소의 희생자 중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의 규모 추정이 가능하다. 목포형무소의 재소자 수는 1949년 8월 1,085명이었고, 형무소 간수부장이었던 이씨(이은형)에 따르면, 국민보도연맹원과 재소자 등 1,4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으므로 당시 희생된 재소자는 1천여 명, 국민보도연맹원은 400여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군폭격 피해>

 

국군과 경찰이 후퇴한 직후인 1950년 7월 24일 오전 정찰기의 선회 후 미 공군 49폭격전대가 목포수력발전소를 폭격하여 수력발전소 근무자 1명이 사망했다. 광주가 7월 23일 인민군에게 점령당했으므로 폭격 당시 목포에는 인민군이 진주하기 이전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근처에 해군기지가 있었으므로 이를 폭격하는 과정에서 희새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목포에서는 후퇴하던 인민군 측에 의해 주민들이 희생되는 사건도 발생했다. 1950년 9월 28일 목포형무소에 있던 주민 120여 명이 트럭에 실려 목포수원지 근처에서 집단희생당했다.

 

<부역혐의 피해>

 

목포지역은 해군에 의해 수복되었으며, 곧 해병대가 주둔하여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색출했다. 이 과정에서도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국군 해병 2대대는 1950년 10월 19일 목포부두에 도착하여 산정국민학교에 대대본부를 설치했으며, 해군의 백부대(백남표 소령의 부대)로부터 목포시의 치안과 경비임무를 정식 인수하고 10월 20일에 해남부근 산악지대, 월출산과 국사봉 토벌작전을 결정했다. 이 시기에 양동과 사산동에 살던 허한수 등 4명이 목포경찰서로 연행되어 어디선가 희생당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8. 12. 5.

목포대학교 운동장

6

형무소

1950. 7. 23.

신안 비금면 해상

1,400

해군, CIC 등

국민보도연맹원 포함

폭격

1950. 7. 24.

목포수력발전소

1

미군

인공

1950. 9. 28.

목포수원지

120

인민군

부역

1950. 10.

4

목포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