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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강릉지역사건 종합

2013.06.20 09:16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150

<지역 현황>

 

강릉지역을 방어하던 국군 8사단은 6월 25일 새벽 6시 사단장이 소집한 작전회의에서 사단 방어계획에 따라 증원부대 도착까지 최대한의 지구전을 펴며 침공을 저지하는 즉시 반격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하지만 6월 26일 주문진이 인민군 5사단 연합부대에게 점령당했다.

 

8사단은 이후 어렵게 연락된 육군본부로부터 강릉보다 서울방어가 문제라는 답을 듣게 되었고, 6월 28일 2시에는 원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당시 8사단의 후방은 인민군의 상륙으로 인해 퇴로가 막혔으며, 영덕방면에는 국군 3사단 23연대가 있었으므로 원주로 철수하게 된 것이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의 점령 후 후퇴시기에 주민들이 집단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내무서 유치장에 갇혀있던 주민들이 9월 28일 강릉읍 홍제동 저수지에서 희생되었다.

 

<부역혐의 피해>

 

강릉지역은 1950년 9월 30일 수도사단과 국군 3사단 22연대에 의해 수복되었는데, 이와 함께 인민군 측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다시 희생되었다. 강릉경찰서에 의한 희생사건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성덕지서 등 각 지서에 의한 피해 사건이 확인되었다.

 

성덕면에서는 성덕지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 7~8명이 10월 9일 성덕면 유산리 도깨비재에서 총살당했다.

성산면에서는 인민군 점령기 인민위원장이었던 금산리 김복기가 국군 수복 직후 왕산지서 경찰에게 살해당했으며, 그의 부친 김진항은 10월 13일 성산지서로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 후 집에 돌아오자 집 앞 감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다. 그의 동생 김흥기는 1951년 1월 3일경 성산지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구정면에서는 인민군을 도왔다는 혐의를 받았던 김탁기 등 10명의 주민들이 11월 7일 구정지서에 끌려간 뒤 구정면 개낼골에서 희생되었다.

묵호항만청에 근무하면서 토목공사를 하였던 오몽용이 국군 수복 후 10월 초 집에서 연행당한 후 다른 부역혐의를 받았던 주민들과 함께 묵호 앞바다에서 수장당했다.

 

<1‧4후퇴 시기 피해>

 

1‧4후퇴 후 시기에도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강릉 홍제동에서는 1951년 2월 백골병단의 노무자로 끌려가던 주민들이 강릉 구 수도저수지 부근에서 60여 명의 주민들과 함께 총살당했다.

 

<미군폭격 피해>

 

미군의 공중폭격에 의한 피해도 많았는데, 주로 1950년 7월에서 8월 사이와 1951년 1월 말에 집중되었다. 확인된 사건은 다음과 같다.

 

1950년 7월 중순 미 전투기가 옥계면 현내리를 공격하여 주민 이문영이 기총사격에 사망했으며, 8월 6일 아침 6시 미 전투기 7대가 병산리(현재 성덕동)를 공격하여 주민 5명이 사망했다. 병산리 근처에는 사용되지 않는 비행장이 있었다. 1951년 1월 27일에는 미 전투기가 강릉 구정면 어단리를 폭격하여 주민 3명이 사망했다.

 

이상 강원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사건을 종합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폭격

1950. 7. ~ 8.

현내리, 병산리

6

미군

인공

1950. 9. 28.

홍제동 저수지

강릉내무서

부역

1950. 10. 9.

유산리 도깨비재 등

7~8

경찰

부역

1950. 10.

묵호 앞바다 등

207

경찰

강원도경찰국

폭격

1951. 1.

구정면 어단리

3

미군

1‧4후퇴

1951. 2.

수도저수지

60

백골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