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충주지역사건 종합

2013.06.18 18:00

관리자 조회 수:3193

<국민보도연맹사건>

 

춘천과 홍천, 원주지역에서 후퇴한 6사단은 7월 3일에는 충주에 집결하여 사단지휘부는 증평에 두었는데, 7월 7일까지 적정이 없어 전투는 없었다. 8일부터 전투가 시작되고 충주를 점령당하자 사단사령부는 9일 보은으로 후퇴했다가 육군본부의 명령에 의해 10일 문경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이 충주에 주둔하던 7월 3일부터 5일 사이 충주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6사단 7연대 헌병에 의해 총살당했다. 당시 후퇴하던 헌병 10여 명이 충주경찰서에 들어와 “보도연맹원을 소집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경찰들은 이 명령에 따라 동네마다 다니며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했고, 주민들은 헌병에게 이끌려 호암동 싸리고개로 이송되어 집단희생당했다. 당시 현장에서 최은용 등 3명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다. 충주군 살미면에서는 주민 73명이 예비검속되어 희생됐다. 시신을 직접 수습한 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쐈다. 조선공산당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김삼룡의 고향이 엄정면이었기 때문에 충주지역에는 좌익단체 가입자도 많았고 그런 이유로 보도연맹원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충주경찰서장은 차일혁 경감이었다.

 

충주지역의 수복은 낙동강 전선을 출발한 국군에 의해 1950년 9월 29일 이루어졌다. 10월 1일에는 7사단 5연대가 충주에 주둔했으며 8연대도 같은 날 안동에서 충주로 진입했다. 6사단이 9월 30일 충주를 출발하여 원주에 돌입했는데, 19연대는 선발대인 제1대대가 11시 20분 운계리를 경유하여 양평으로 진격하던 중 14시에 원주까지 진출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3.~5.

호암동 싸리고개

수백

6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