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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음성지역사건 종합

2013.07.16 10:08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429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한 후 1950년 7월 5일부터 음성지역의 주민들이 국민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되어 희생되기 시작했다. 당시 후퇴하던 6사단 9연대 소속 중령 1명이 음성경찰서로 들어와 군내 국민보도연맹원 등을 학살할 계획을 세웠다. 음성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된 주민들의 피해사실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으나 대소지서 등 각 지서에서 저질러진 사건은 확인되었다. 대소지서에서 소집한 보도연맹원 30여 명은 7월 5일 진천군 만승면 조리방죽에서, 원남지서에 소집된 보도연맹원 30여 명은 7월 8일 원남면 문암리 백마령 고개에서 집단희생당했으며, 이외에 소이면 여인구가 음성군 소이면 ‘가막골’에서 희생되었다.

 

<부역혐의 피해>

 

국군 수복 후에는 복귀한 음성경찰서가 인민위원회 사무실 등에 남아 있는 서류와 마을주민들의 신고 등을 근거로 부역주민들을 찾아내 부역자수서를 받았다. 경찰은 이를 근거로 갑을병정 4등급으로 부역정도를 판단하여 분류하였다. 그런데 각 지서를 거쳐 음성경찰서 임시 유치시설로 이송된 주민들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고문을 받았으며 실제 고문 도중 숨진 주민들의 시신이 창고에 쌓여 있었다고 한다. 조사 후 갑종으로 판단된 주민들은 음성경찰서 인근의 구덩이에 총살․암매장되었다. 이 시기의 피해사실이 구체적으로 조사된 경우는 대소면과 감곡면이었다. 대소면 삼호리 곽성근 등 주민들은 대소지서에서 매를 맞은 후 음성경찰서로 이송되었으며, 감곡면 상우리 주민 10여 명도 음성경찰서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11월 1일 경찰서 인근의 한 구덩이에서 집단 희생당했다. 이 외에 위 곽성근이 1950년 12월 21일 고문 중 타살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1‧4후퇴 시기 피해>

 

음성지역의 주민들이 가장 크게 피해를 입은 사건은 1‧4후퇴 시기에 국군 6사단과 국민방위군에 의해 벌어졌다.

음성에서는 1950년 12월 음성군 대소면 국민방위군 8단 2지 2편 8구대가 편성되었다. 이들은 법률상 그리고 사실상 육군참모총장 이하 군 간부의 지휘 아래에 있었다. 1951년 1월 초순 국군 6사단이 충북 진천으로 이동하였는데, 1월 5일에는 6사단 19연대 헌병파견대와 19연대 1대대가 음성군 대소면에 주둔하였다. 이들은 1951년 1월 7일 제2차 철수령이 내려지기 직전인 1월 5일에 국민방위군을 지휘하여 음성군 대소면 부역자수자를 소집․검거하였다. 국군이 당시 음성경찰서 대소지서를 사무실로 사용함에 다라 대소지서 경찰관들은 향토방위대 사무실을 이용해야 했다. 헌병대는 1월 5일 지서의 경찰관들에게 “면내 부역자수자를 소집하여 심사 후 총살할 것이므로 협조하라”고 지시하였다. 당시 대소지서는 1950년 10월 작성하여 비치하여 두었던 부역자수자 명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헌병대는 이에 따라 국민방위군과 함께 주민들을 소집․연행하였다.

주민들 소집은 1951년 1월 5일 정오부터 시작하여 다음 날인 6일 오전까지 계속되었다. 오산리에서는 국민방위군 간부가 별도로 작성한 명단을 근거로 주민들을 연행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총살당할 것이라고 짐작한 주민들도 있었으나, “도민증을 받아가라”는 말에 대부분은 별다른 의심 없이 소집에 응해 대소국민학교로 갔다.

국군 6사단의 지시에 의해 대소국민학교로 소집된 대소면의 주민들은 연행 직후인 1951년 1월 5일 저녁부터 취조를 당한 후 네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당시 대소지서 순경의 목격담에 따르면, 1951년 1월 6일 대소국민학교에 60여 명이 갇혀 있었는데, 4학년 교실에 20여 명, 5학년 교실에 40여 명이 있었다.

헌병대 파견대는 1951년 1월 6일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대소국민학교에서 갑으로 분류된 60여 명의 주민들을 19연대 1대대(대장 김복교 소령)에게 인계했다. 같은 날, 19연대 군인 20여 명은 주민들을 대소국민학교 앞 개울가에 세워놓고 등 뒤에서 총을 쐈다. 군인들은 대소국민학교 앞에서의 학살 후, 을로 분류된 주민 일부를 현 대소중학교 인근에서 또 총살하였다. 이때 을로 희생된 주민들이 몇 명이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두 번째 총살 당시에 군인들은 주민들을 도망가라고 한 후 뒤에서 총을 쐈다는 증언이 있는데, 이는 운이 좋으면 살아서 도망가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재수복시기 부역혐의 피해>

 

음성지역에서의 1‧4후퇴시기의 학살은 재수복 후인 2월에도 저질러졌다. 1951년 1월 6일 대소면 부역자수자 학살사건을 일으킨 뒤 남으로 후퇴하였던 대소면 국민방위군이 1951년 2월 7일경 복귀했다. 이들은 “2매의 불온삐라를 배포”했다는 빌미로 인민군 점령기 오산리 인민위원장이었던 조성만 등 20여 명의 주민을 체포하여 대소지서 유치장에 감금했다. 국민방위군 대소면 중대장 김씨는 1951년 2월 10일경 복귀하여 자기보다 3일 먼저 대소면에 복귀한 소대장 민씨로부터 이와 같은 내용의 보고를 듣게 되었다. 1951년 2월 22일 중대장 김씨는 대소지서주임을 만나 대소지서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는 주민들에 대한 처리방안을 상의하였고, 2월 23일 밤 오산리 조성만 등 3명을 오산리 밤나무골에서 총살했다. 이어 다음 날인 2월 24일 국민방위군 소위 민씨는 수태리 김영제 등 5명을 오산리 밤나무골 사태복에서 총살했다. 이들은 1950년 10월 자수하여 석방되었고, 1951년 1월 6사단에 의한 학살사건에서도 풀려났으나 2월 또 다시 끌려가 학살당한 것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중대장 김씨 등이 ‘살인’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었으나 1심에서 증거부족으로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검찰은 이에 항소하지 않았다. 단심제인 ‘비상조치령’ 위반이 아닌 3심제인 ‘살인’ 혐의로 기소한 것도 당시로서는 일종의 특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 음성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을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5.~8.

진천군 조리방죽 등

60

6사단

부역

1950. 10.

음성경찰서 인근

경찰

1‧4후퇴

1951. 1. 6.

대소초등학교 개울 등

60

6사단

1‧4후퇴

1951. 2. 23.~24.

오산리 밤나무골

8

국민방위군

대소지서와 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