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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괴산지역사건 종합

2013.06.25 09:37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588

 20131012_괴산위령제.jpg

(괴산 사리면 희생자 위령탑)

 

<전쟁 전 정치적 학살>

 

괴산에서는 1947년 말 조병옥 미군정청 경무부장이 충청북도 증평을 방문 했는데 이때 경찰관이 증평삼거리에서 군중을 밀어내다가 총을 발사하여 증평 초중리에 살던 이갑출이 사살당했다. 경찰은 실수에 의한 오발이라고 주장했다.

 

<전쟁 전 토벌작전 피해>

 

괴산에서는 전쟁 발발 전 국군의 토벌작전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주민들이 고초를 겪었다.

1950년 2월 청천면 하관평리에 나타난 1개 분대 규모의 무장 군인들이 눈에 띄는 대로 하관평과 홍주막(청천면 관평리와 접해 있는 경북 마을)의 남성들을 총으로 위협하며 연행했다. 당시 연행된 청장년들은 모두 13명 이었다. 군인들은 연행한 주민들을 홍주막 마을 앞에 있는 보로 데려갔다. 당시는 2월이라 추운 겨울이었고 보에는 반 길 정도의 얼음물이 고여 있었다. 군인들은 연행한 주민들의 옷을 모두 벗기고 찬 얼음물 속에 들어가게 했으며, 서로에게 물을 뿌리도록 했다. 주민들은 서로 잘 알고 있는 이웃이므로 물 뿌리는 것을 주저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서로 물을 뿌리지 않으면 죽인다며 물속을 향해 여러 발의 총을 쐈다. 군인들은 한 시간 가량 후 벗었던 옷을 머리에 묶고 알몸 상태 그대로 끌고 1km 정도 위에 떨어져 있던 중관평 마을을 지나 상관평까지 끌고 갔다. 끌려가던 주민들은 몸이 얼은 상태이므로 자주 넘어졌으며 특히 나이가 있던 노인들이 그랬다. 넘어질 때마다 군인들은 사정없이 때렸는데, 이들의 만행은 집안에 숨어 있었던 주민들 대부분이 목격했다. 얼마 후 모두 풀려났으나 당시 받은 고문으로 인해 몇 사람이 병으로 사망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괴산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6사단 헌병대에 의해 집단학살당했다. 괴산지역의 주민들은 1950년 7월 7일경 증평읍 양조장과 양곡창고, 도안국민학교, 청원군 북이국민학교, 괴산경찰서 유치장 등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9일 6사단 7연대 헌병대와 CIC, 경찰에 의해 희생되었다. 희생 장소는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괴산군 감물면 공동묘지, 괴산군 청안면 조천리 솔재티, 괴산군 괴산면 남산 등으로 확인되었다.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에서는 1950년 7월 9일 괴산경찰서 유치장과 청원군 북이초등학교, 증평읍 양조장 등에 감금되어 있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북이국민학교에는 청원군 주민들을 비롯하여 칠성면, 도안면 주민들이 있었으며, 증평읍 양조장 등에는 증평읍 주민을 비롯하여 사리면 주민들이 있었다. 옥녀봉에는 헌병이 구덩이를 판 채 총살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총살은 4시간 동안 진행되었다고 한다. 옥녀봉에서 사망한 희생자만 800여 명에 이른다. 옥녀봉 외에도 괴산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주민 20여 명이 괴산면 남산에서 희생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한편, 벽초 홍명희 모친인 조경식과 제수인 김OO이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희생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생존 보도연맹원 증언과 가해 측 목격담에서 확인된다. 괴산군은 홍명희가 부친 홍범식의 유훈을 이어 3․1운동 등 항일운동을 벌였던 곳으로 그의 영향력이 괴산군 전역에 퍼져 있었다. 당시 옥녀봉 희생 장소에서 현장을 목격한 북이면 의용소방대원 윤씨(윤기병)는 “연행자 가운데 홍명희의 모와 제수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소복차림의 홍명희의 모 조경식(74세)은 연행자들과 따로 서있었고 총에 맞고 쓰러지자 군인들이 금가락지를 빼 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각 지서에 의해서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들도 있었는데, 청안면의 주민들은 청안지서에 소집되어 지서 앞에 있는 양곡창고에 감금되었다가 이중 24명이 조천리 솔티재에서 희생되었으며, 감물면의 주민들은 연행된 첫날 지서장의 권고로 피신했으나 다음 날 1950년 7월 7일 군인(CIC)들에게 12명이 연행되어 감물면 백양리 공동묘지에서 희생되었다. 한편 당시 수안보지서 근무자 증언에 따르면, 수안보지서에도 헌병 3명이 소집된 보도연맹원 4명을 야산으로 끌고 가 총살했는데, 1명은 죽지 않고 살아났다고 한다. 괴산지역의 희생자는 모두 1,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복 후 토벌작전 피해>

 

국군 수복 시기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주로 1사단의 토벌작전에 의한 것이었다. 미군의 예비사단이 되어 속리산 인근의 패잔병 토벌을 담당했던 국군 1사단 11연대는 9월 28일 청천면 청천리에 진입했으며 수복과 함께 인민군 점령 하에서 인민위원회 등에 부역한 주민들을 색출해 즉결처분하기 시작했다.(한국전쟁사 4, 159쪽)

 

10월 1일 11연대가 청주 일대에 진입했는데, 1대대는 청주 낭성, 3대대는 어은 송정리 일대에 배치되었으며, 2대대는 청주 후평리 고지 일대에 주둔하고 있었다. 1사단은 10월 2일에도 수복작전을 계속했으며 작전 결과 적 486명을 사살했으며, 806명을 포로로 생포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 시기에는 이미 인민군들이 후퇴한 뒤였으며, 괴산을 경유해 태백산으로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퇴로가 막히자 청천면 부근에 잠시 머물게 되었고 이 때문에 국군의 소탕작전이 있어 주민들 피해가 컸던 것이라고 한다.

 

<부역혐의사건 피해>

 

괴산에서도 부역했다는 의심만으로 불법적으로 희생당한 주민들이 증언과 자료에서 확인된다. 확인된 희생자들이 비록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상당히 많은 괴산지역 주민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정리하여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증평을 수복하던 국군은 의사였던 남편 송능섭이 인민군 측 환자를 치료했다는 이유로 그의 처를 총살했다. 같은 시기에 폭격을 피해 자연동굴이나 방공호에 숨어 지내던 연풍면 갈금리 주민들은 수복과정에서 갈금리를 수색하던 국군들에 의해 희생되었다. 당시 방공호에 숨어있던 임종국 가족과 마을 주민을 발견한 국군은 이 중 임종국을 조사하겠다며 연행하여 대검으로 살해했다.

 

인민군에게 부역을 했던 주민들이 국군에게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산으로 숨어 피난생활을 하던 주민들이 있었다. 당시는 정당한 절차에 의해 재판을 받는 것이 아니어서 잡히는 대로 즉결처분 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자수도 하지 못하고 산에서 숨어 지내야 했다. 이들이 가끔 마을에 나타나 식량을 훔쳐가는 일이 있었다. 관평리 고개 너머인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출신의 김수리는 자수권유에도 불구하고 어느 마을 집더미 속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선교착 후 토벌작전 피해>

 

1‧4후퇴 후 전선이 고착되기 시작한 1951년 2월 괴산지역에 대한 토벌작전으로 인해 주민들이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1951년 2월 17일 괴산 청천면지역에 주둔하던 인민군 패잔병 또는 빨치산을 물리친 국군 토벌부대가 다음날인 2월 18일부터 청천면에서 토벌작전을 벌였다. 이 부대는 경북 예천에 본부를 두고 안동, 상주, 괴산 등 일대를 관할했다고 하는데, 관평리 산 넘어 경북 문경시 가은읍에 소대가 있었고, 봉암사에 1개 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 부대에는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으며 남쪽 출신들 역시 폭력적이어서 민폐를 많이 끼쳤다고 한다. 당시 산에는 인민군 패잔병과 피신한 부역주민들이 숨어 지내면서 마을에서 식량을 빼앗아 연명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주민들은 인민군 측과 국군 측 모두에게 밥을 지어 날라다 줘야하는 힘겨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때문에 국군과 인근 지역 방위군으로부터 부역(附逆)한다는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

 

인민군 패잔병이 물러간 직후인 1951년 2월 18일 보은에서 올라 온 국군 토벌부대가 청천면 사담리, 상신리, 공림리 3개 마을에 동시에 진입했다.

 

사담리에 진입한 한 군인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있었으며, 집에 있던 주민들을 나오게 한 뒤 초가집 처마 끝에서부터 불을 질렀다. 주민들이 머뭇거릴 경우 총을 쏘기도 했으므로 옷이나 이불 등 가재도구를 전혀 들고 나올 수 없었다. 심지어는 식량조차 꺼내오지 못 한 채 불길에 재가 되었다. 이 작전으로 사담리 본동 20여 호와 공림리 10여 호가 물레방앗간 1채를 제외하고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공림리에 진입한 군인들은 마을에 인민군 패잔병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산에서 마을을 향해 총을 쏜 후 진입했다. 하지만 당시 인민군 패잔병들은 이미 마을에서 사라진 뒤였다. 공림리에서는 한 여인이 총소리에 놀라 우는 간난아이 때문에 집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고 방에 있었는데, 빨리 나오지 않는다며 군인들이 방에 집중사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아기에게 젖을 물린 채로 총상을 당한 여인은 며칠 후 아기와 함께 사망했다. 집에서 나온 주민들이 군인들에게 어디로 피난 가느냐고 묻자 군인들은 보은으로 가라고 답하면서 “애들만 아니었으면 다 총살시켰다”라고 했다. 주민들이 국군에게 왜 이런 짓을 저지르는 지 묻자, “또 다시 인민군이 들어와서 은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작전상 어쩔 수 없었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로 보아 당시 국군 작전의 목적은 패잔병 토벌이 아니라 주민을 마을에서 소개하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군인들은 마을의 집들을 모두 태우면서 집안에 있던 살림살이와 식량까지 하나도 가지고 나오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다.

 

사담리와 공림리 아래에 있던 상신리는 당시 70여 호가 살던 마을이었는데, 외따로 있던 건조실 한 채를 제외하곤 모두 불에 타 사라졌다. 당시 군인들이 상신마을에 불을 지르려 하자 한 노인(임영상 부친)이 군인을 끌어안으며 이를 막으려고 했다. 그러자 이 노인을 마을 앞 논 바닥에서 사살해 버렸다.

 

국군 토벌부대는 사담‧공림‧상신리에서 소개작전을 벌인 지 8일 뒤인 2월 26일 관평리에서 다시 소개작전을 벌였다. 당시 110여 가구가 살던 하관평 마을에는 전염병이 돌고 있었으며 미군폭격까지 당해 하루하루 생존이 힘들 때였고, 집에는 피난하지 못한 아픈 환자나 어린아이 또는 이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국군 토벌부대의 관평리 소개작전 역시 아무런 예고 없이 저질러졌으므로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집안의 식구들을 먼저 피신시켜야 했으며 집안에 있던 식량이나 옷가지, 이불 등은 꺼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2월 26일 300여 명에 달하는 국군토벌부대가 하관평 마을에 진입하여 주민들을 마을 앞으로 모았다. 이들은 인민군의 근거지를 없애야 한다며 기름을 적신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서 집집마다 불을 놓았다. 화마를 피하고 남은 집은 마을 중심에서 떨어져 있던 단 2채 뿐이었다. 군인들은 병중에 있는 노인들이 집에 남아 있음에도 사정없이 불을 질러 가재도구는커녕 식량 한 톨 건지지 못한 채 몸만 빠져나와야 했다. 결국 전염병에 감염된 데다가 집 밖으로 내몰려 추운 날씨를 견디지 못한 노인들이 거리에서 동사당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다행히 낮에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군인들에게 직접적 피해를 당한 주민들은 없었으나 남겨진 주민들은 당장의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하게 되어 근처의 친인척을 찾아가거나 움막을 치고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토벌부대가 주둔해 있는 동안 논물을 보러 나가던 주민이 집 앞에서 사살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작전을 마치자 국군 토벌부대가 마을을 빠져나갔는데, 주민들은 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같은 청천면일지라도 사담리와 관평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작전 일시가 달랐던 것으로 보이며, 국군 토벌부대가 사담리에서 관평리로 이동하는 사이에 있던 마을들 역시 국군의 소개작전 대상이었을 것으로 보이나 아직까지 피해사실에 대해 알려지지 않았다.

 

<미군폭격 피해>

 

괴산지역은 1950년 7월과 1951년 2월 두 차례에 집중되어 미군의 폭격 피해를 입었다.

국군은 1950년 7월 14일 음성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를 시작했으며 같은 날 인민군은 도안면을 통과했다. 다음 날인 7월 15일 오전 정찰기가 괴산군 도안면 송정리를 비행한 후 전투기가 네이팜탄으로 폭격하였다. 이로 인해 마을 세 집이 소각되고 집 안에 있던 연병수, 남의녕 등 주민 2명이 사망했다.

 

1951년 2월 7일에는 청천면 관평리가 미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았다. 당시 사건 전날까지 인민군 패잔병 수백 명이 관평리에 주둔했는데, 어떻게 미군의 폭격계획을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이들이 모두 후퇴하고 난 뒤 폭격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오전 11시경 먼저 미군 정찰비행기가 관평리를 돌아본 후 곧 F80 세이버 폭격기 4개가 나타났다. 이들은 좌우로 돌면서 네이팜탄, 미사일, 기관포로 상관평, 중관평, 하관평, 홍주막(문경 가은읍 완장리)을 공격 하였다. 이로 인해 미처 은신할 겨를도 없이 방에 있던 주민 6명이 현장에서 숨졌고, 2명이 부상당해 평생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로 인해 마을 주택의 절반 가까이가 불에 타 재가 되었다.

 

이상 괴산지역에서 발생한 민간인집단학살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7.말

증평삼거리

1

경찰

전쟁 전

1950. 2.

청천면 관평리

국군

보도연맹

1950. 7. 7. ~ 9.

옥녀봉 등

1,000

6사단

부역

1950. 10.

1사단

토벌

1951. 2. 18. 26.

사담리, 관평리 등

10

880부대

폭격

1950. 7. 15.

도안면 송정리

2

미군

폭격

1951. 2. 7.

청천면 관평리

6

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