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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예산지역사건 종합

2013.07.23 22:37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130

<국민보도연맹사건>

 

예산에서는 1차로 100여 명의 주민들이 예비검속당했으나 예산경찰서는 이들을 그대로 두고 7월 7일 후퇴하였다. 그러나 상부의 질책을 받은 경찰서는 다시 복귀하여 석방한 주민 일부를 다시 검속하게 되었다. 이때 다시 잡힌 12명의 보도연맹원들은 7월 11일경 대술면 화천리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인민군이 예산에 진입한 때는 7월 12일이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예산에서는 인민군 후퇴시기에도 주민 피해가 있었다. 1950년 9월 28일까지 예산내무서에 갇혀 있었던 주민들이 집단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당시 홍성내무서장 강성기 소좌는 9월 27일 11시경부터 소장하고 있는 문건을 소각하는 등 후퇴준비를 한 뒤 홍성읍을 떠나 1950년 9월 28일 새벽 1시경 예산군 신양면 신양리 부근에 도착하였다. 이들이 신양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유엔군과 국군이 신양면 신양리에 입성한 상태였으므로 피신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부역혐의 피해>

 

미군과 국군은 9월 28일 새벽 1시 예산군 신양리 부근에 진입했으며(KWC#304), 예산경찰서는 10월 6일 공식 복귀하였다.(『충남경찰사』, 1986, 766쪽) 예산에서는 9월 28일경 인민군이 후퇴하자마자 복흥대라고 불린 민간치안조직이 활동하였다. 이들에게 연행된 주민들은 각 면 소재지 창고 및 지서 유치장에 갇혔다. 예산경찰서 유치장과 무도관, 부근 곡물창고 2동, 예산 전매국 담배창고에는 500~600명의 사람들이 구금되었으며, 이들은 신리 수암산 오생이뻘과 관장리 구양교 다리 산모퉁이, 신례원 공동묘지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과정에서 예산 연초경작조합 직원 조한직이 예산 전매국 담배창고에 감금되었다가 10월 17일 10여 명과 함께 신례원 공동묘지에서 총살당한 사실과 예산 연초경작조합 이사였던 정성모가 10월 6일 사택 부근 개천가에서 살해당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예산경찰서 산하 각 지서에서도 희생사건이 있었다.

 

덕산면에서는 양곡창고에 갇혀 있던 50여 명의 주민들이 10월 17일부터 19일 사이에 예산경찰서의 총살장으로도 쓰였던 신리 수암산 오생이뻘 등에서 집단희생되었다. 희생자들 중 덕산면 인민위원장이었던 시량리 김영한과 그 가족, 친인척들이 10월 17일경 살해당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봉산면에서는 면사무소 맞은 편 소방서 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 30여명이 봉산지서에 의해 대지리 고개(일명 붉은고개)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삽교면에서는 삽교지서 유치시설과 양조장, 복흥대 사무실 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신가리 꽃산, 신리 수암산 오쟁이뻘, 두루머리 공동묘지, 목리 등에서 집단희생당했다. 송산리 조병하 등 16명과 예산군 인민위원장이었던 두리 금홍 등 8명의 희생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상 예산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 피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11.

대술면 화천리 뒷산

12

예산경찰서

인공

1950. 9. 28.

예산내무서

내무서

부역

1950. 10.

신리 수암산 등

500~600

예산경찰서

부역

1950. 10.

대지리 붉은고개 등

100

각 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