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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아산지역사건 종합

2013.07.23 22:32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306

<국민보도연맹사건>

 

아산에서도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는 증언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이에 대해 조사된 바는 없었다. 이에 관련된 증언으로 온양경찰서 수사계 근무자 임씨의 것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후퇴 직전 온양읍 풍기리(현 풍기동 온양천) 냇가에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되었다.

 

<부역혐의 피해>

 

아산지역에서는 1950년 9월 26일 미군 기갑사단이 대전, 조치원을 차례로 수복하고 북진 중이었는데, 이들이 천안을 통과해 서울로 진격할 것이라는 소식이 아산지역에 퍼지자 인민위원회, 내무서 등에서 사무가 중지된 반면, 지하활동을 하던 반공단체들이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1950년 9월 26일 천안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산군 탕정면을 시작으로 9월 27일에는 서쪽 예산 방향 도고면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었는데, 좌익 측 사무가 중단되었고 아산군의 중심지인 온양읍을 비롯해 염치면, 탕정면 등 동북부지역에서 먼저 치안대가 조직되어 부역자 체포가 시작되었다.

이어 9월 29일 온양읍에 입성한 미군은 신창면을 거쳐 선장면, 도고면에까지 진출한 후 10월 1일 천안으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아산군 전역에서 치안대가 조직되었고 ‘혼란이 야기될 정도로 부역자들에 대한 처리’가 자행되었다. 온양경찰서 선발대는 9월 29일 경 미군과 함께 아산지역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이며, 10월 4일 온양경찰서가 공식 복귀했다.

 

경찰의 복귀에 따라, 각 면의 주민들이 경찰선발대의 지휘를 받던 청년들에 의해 연행되어 임시구금시설에 감금되었는데, 온양읍 방축리 주민들은 같은 마을 내 그릇 굽는 가마에 감금되기도 했다. 이들은 온양경찰서로 이송되어 유치장 뿐 아니라 경찰서 뒷마당, 인근 양조장에까지 구금되었으며, 사찰계의 주도로 조사를 받으면서 구타, 전기고문을 당했다. 조사를 마친 주민들은 1950년 10월 중순 매일 밤 트럭으로 40~50명씩 탕정면 구령리(현 배방면 남리) 돌장원 성재산 등으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이런 광경을 적어도 5~6번 목격했다고 증언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관련 증언들을 종합하여 이 시기 배방면 성재산에서 희생된 사람은 최소 2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판단했다. 온양경찰서 수사계 근무자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희생지는 성재산 방공호 외에도 세일 폐금광, 온양천이 더 있었다.

 

아산지역의 각 면 주민 상당수는 온양경찰서로 이송되기도 전에 각 지서 인근에서도 학살당했다.

 

탕정면의 주민들은 “자수하라”는 각 마을 이장의 통지에 의해 면사무소로 모였다. 탕정면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왔거나 연행되어 온 주민들이 300여 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탕정지서와 곡물창고에 나뉘어 감금되었다. 이어 의용경찰과 치안대로부터 부역사실을 자백하라는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며 10월 중순경부터 호명되어 나가 지서 뒷산 방공호에서 학살되었다. 당시 희생자 수는 90여 명에 이르렀는데, 매곡리 1구 희생자가 가장 많았다.

 

염치면 대동리 주민들은 9월 말부터 10월 사이 새지기 공동묘지, 삼서초등학교 운동장, 뒷산 방공호 등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염치면 치안대 사무실은 삼서초등학교에 있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마을 가옥에 감금되었다가 2~3일에 거쳐 새지기 공동묘지에서 살해되었다. 당시 끌려간 사람들은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죽을 만큼 몽둥이에 맞은 다음 구덩이에 던져졌고,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꿈틀거린 채 생매장되었다고 한다. 산양리 주민 일부는 삼서국민학교 운동장에 끌려가 온양경찰서에서 나온 낯선 사람들에게 타살당했으며 다른 주민들은 마을 안 곡식창고에 감금되었다가 뒷산 방공호에서 총살당했다.

 

선장면 주민들은 10월 선장지서와 치안대에 의해 연행되었다. 궁평리 최상현 등 10여 명의 주민들은 선장지서로 연행되어 11월 9일 읍내 쇠판이골에서 함께 집단희생당했다. 어떤 주민들은 다른 면 치안대에게 연행되어 자신들이 살던 마을 안에서 살해당하기도 했다. 10월 초 선장면 홍곳리 문남기 등은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신창면 치안대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10월 22일 같은 마을 주민 10여 명은 신창면 오목리 치안대에 의해 마을 강습소로 연행되었다가 그날 밤 살해되었다.

신창면에서 벌어진 사건은 신창지서 주임이 저지른 ‘살인, 사형금지법 위반 등’에 대한 판결문이 있어 당시 사건의 경위와 결과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9·28 수복 후 신창지서는 신창면 주민 6백여 명을 오목리에 있는 창고에 감금했다가 10월 20일 오후 7시 이 중 오목리 김옥화 등 50여 명을 오목리 앞산에서 총살하였으며, 10월 22일 오전 5시 이시우 등 50여 명을 끌어내 염통산 방공호에서 총살했다.

 

<1․4후퇴 시기 피해>

 

아산지역에서는 1․4후퇴 당시 재점령당하지 않았음에도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의 가족들이 예비검속당해 집단희생당했다. 이런 사건은 배방면과 신창면에서 확인되었는데 이 사건이 발생한 원인은 법무법제관계서류철(BA0135093)에 잘 드러난다. 이 문서에는 “중공군이 평양시에 진입태세를 취하자 아산군의 일부 적색불순분자들이 폭동을 야기할 기색이 농후”하다고 판단한 경찰이 이 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적고 있다. 당시 배방면사무소 근무자는 온양경찰서로부터 배방지서와 배방면사무소에 내려진 부역자 처형지침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로 보아 온양경찰서 역시 경기도와 마찬가지로 충남도경찰로부터 명령을 받아 각 지서와 면에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배방면에서는 일가족이 희생당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희생장소는 주로 성재산 방공호와 배방면 폐금광이었다. 배방면에는 2개의 곡물창고와 1개의 배방역전 창고가 있었는데 면 주민들이 이곳에 감금되었다. 대부분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의 가족들은 경찰에 의해 별도로 관리되었는데, 1·4후퇴를 하려면 도민증이 있어야 한다며 도민증 발급을 이유로 은밀히 야간에 연행되었다. 감금된 주민 중에는 부녀자, 노인, 유아는 물론 영아까지 포함되었다. 현장 생존자 맹석재는 1951년 1월 7~8일에 배방면 향토방위대가 면내 10여 개 마을에서 “도민증이 없는 사람은 도민증을 발급하고 시국이 시국인 만큼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켜주겠다”라며 남녀노소 300여 명을 면 곡물창고에 집합시킨 후 저녁에 ‘뒷산(성재산)’으로 새끼줄로 묶어 끌고 가 총살했다고 증언했다.

 

한편, 관련자료에 의하면, 1951년 1월 6일 저녁 8시 배방지서 순경이 향토방위대장과 공모하여 ‘좌익분자 및 가족’ 183명을 창고에 예비 검속해 두고 전원 총살 후 부근 ‘금광굴혈’에 사체를 유기하였다. ‘금광굴혈’은 배방면 세일 폐금광을 가리키는 것으로 금을 채굴하던 시기 ‘금방앗간’이 있었던 중리3구에서는 뒷산에 있다 하여 ‘뒷터골’이라고 불렀다. 폐금광의 희생자들은 주로 온양, 배방, 신창 등 주민들이었고 사체를 매장할 때에는 중리3구 청년들이 동원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당시 이 사건으로 희생된 주민들로 배방면 북수리 김석남 일가족 6명 등 12명을 확인했으며, 성재산 방공호와 세일 폐금광에서 희생된 주민들의 수는 모두 3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신창지서는 1951년 1월 9일 면 주민 11명을 총살했으며, 1951년 1월 15일 구금되어 있던 주민 중 임중빈 등 6명을 의용경찰들을 지휘하여 총살시켰다. 1955년 1월 18일 『한국일보』는 1․4 후퇴 시기 신창지서에 의해 신창면 수리조합창고 및 매봉산․염통산골짜기 등에서 150명이 총살되었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 1955. 1. 7> ‘양곡 1000 가마 횡령? 지검 김검사 급거 아산에’

지검 김(김익보) 검사는 지난 5일 입회 서기를 동반코 충남 아산에 출장하였다. 알려진 바 동 출장이유는 전 아산군 신창지서 정해진씨와 관련된 사건으로서 전기 정 피의자가 정부보유미 1천 가마 횡령혐의와 부역자 아닌 양민을 부역자라고하여 10여 명을 학살한 것에 대하여 현지 임검차 출장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6일 지검 관계자는 전기 사건은 오래 전부터 내사하여 오던 것으로서 금번 정 피의자의 또 다른 ‘사기혐의’에 관련하여 전기 사건과 동시에 진행케 된 것이라고 한다. 한편 담당검사는 8일 귀경하리라고 하는데 귀경 후 동 사건은 급진전 될 것이라고 관계자는 말하고 있다.

 

<동아일보 1955. 1. 7> 잡고 보니 중범인, 횡령사건에 걸린 전 경관

조그마한 “횡령”사건으로 신년 정초 서울지검에 송치된 사건 피의자가 알고 보니 과거 충남에서 어마어마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한 전직 지서주임이었다.

사건의 주인공은 현재 무직으로 있는 정해진이라는 당년 32세의 청년. “횡령”사건 혐의로 지난 4일 경찰에서 서울지검으로 송치되어 김익보 검사 담당으로 문초가 시작되었는데, 과거 경력을 더듬어 보니 그가 바로 과거 아산군 신창지서 주임으로 있을 당시 1‧4후퇴의 혼란시기를 이용하여 정부관리 양곡 약 1,000가마를 횡령 착복한 외에 무고한 양민 10명을 “부역자”라는 명목으로 살해한 커다란 사건의 혐의자임이 판명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묘하게도 전기 담당 김익보 검사는 전에 대전지검 관내에 근무하고 있을 때 동 사건을 인지, 입건하여 조사 중 정이 도주해 버림으로서 사건을 기소중지로 보류한 바 있는 바로 그 사건의 담당검사였던 것이며 그후 김검사는 서울지검으로 전근되어 근무 중 이번 우연히도 정의 새로운 “횡령”사건의 담당 검사로 배정되어 정의 전과가 탄로케 된 것이라 한다.

김검사는 이번 사건을 접수한 지난 4일 곧 과거사건 보충수사차 아산으로 출장하였으며 입회서기 또한 지난 6일 현지로 향발, 오는 8일 귀임할 예정으로 있는데 현지 수사의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경향신문 1955. 1. 13> “인원수는 틀린다” 학살을 시인하는 유피고

양민 120여 명과 부역자 130여 명을 불법 학살하는 한편 정부 보유미 450가마를 횡령한 혐의로 지검 김익보 검사에 의해 취조를 받고 있는 전 신창지서 주임 유해진은 12일 실시된 문초에서 제반 범죄사실은 시인하였으나 학살 인원에 대해서는 70여 명에 불과했다고 인원수에 대해 부인하였다.

한편, 유 피의자는 학살당시 ‘구덩이’는 경찰서에서 판 것이 아니라고 진술하는 한편 70여 명에 대해서만 학살하였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담당 검사는 허위진술여부에 관해서 예리한 심문을 전개하였다.(사진은 유 피의자 심문광경)

 

<경향신문 1955. 1. 15> 140명을 집단학살, 신창지서주임 14일 기소

양민학살 및 정부 보유미 횡령혐의 유해진(전 신창지서 주임)은 그간 지검 김(김익보)검사의 문초를 받아오던 중 14일 하오 일건 서류와 함께 ‘살인‧사형금지법위반‧수회‧업무상 횡령‧횡령’의 6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무려 1천여 페이지에 달하는 동 기소장에는 전기 유 피의자의 천인공노할 피의사실이 다음과 같이 기제되어 있었다.

․4283년 10월 초순 당시 부역자 및 양민 등 6백 여명을 신창면 오목리 김용한씨 창고에 구금하여 놓고 4284년 1월 2일 하오 7시경 부역자의 부인 김옥화(25) 및 김의 2남 이명희(2) 외 60명을 오목리 앞산에 연행하여 법에 의하지 않고 기관총으로 집단학살

․4283년 10월 22일 상오 5시경 부역자의 가족 이시우(55), 이경남(4) 등 50명을 염동산에 연행하여 소총으로 집단학살

․4284년 1월 15일 하오 5시 창고 안에 있는 부역자 및 그의 가족 30명을 여동산에 연행하고 소총으로 집단학살

․4283년 12월 부역자 이학균씨의 아버지 이우성씨로부터 석방금 9만환을 받고 불법 석방

․동일 임중빈의 형 임익빈씨로부터 10만환을 받고 임을 석방

․4283년 12월 하순경 신창역전에 있는 정부보유미 424가마를 불법 횡령 등등

 

<동아일보 1955. 1. 15> 양민살해한 유, 14일 기소

기보=조그마한 사기 횡령사건으로 서대문서에 피검 조사를 받다가 서울지검에 송치된 후 의외에도 양민다수를 학살한 과거의 어마어마한 죄산이 새로이 들어나 김익보 검사 담당으로 다각적인 조사를 받아오던 온양경찰서 신창지서 전 주임 유해진(31)은 드디어 지난 14인 “살인”, “사형금지법”, “엄무상횡령”, “수회” 등 죄명으로 구속 기소되었다.

기소사실에 의하면 유는 동 지서주임으로 있을 당시 1백여 명을 학살하는 등 대략 다음과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

․83년 10월과 12월, 84년 1월의 전후 3회에 걸쳐 부역자 명목 또는 그 가족이라고 하여 일가족 전원 심지어는 두 살 난 어린아이들까지 모아서 집단살해한 수가 114명(증인들의 말을 종합하면 대략 150명이고 한편 피의자 진술은 “하도 많은 수가 되어 상세한 것을 알 수 없고 70명 내지 80명만 기억이 난다”고

․부역자 또는 그 가족들로부터 죽이지 않고 용서해 준다는 명목으로 수회한 금액이 약 19만환

․정부미 450가마를 횡령 착복

 

<경향신문 1955. 1. 28> 신창지서주임 공판, 오는 3일 서울지법서

기보=양민 150명을 학살하였다는 혐의롯 서울지검에 의하여 기소된 전 신창지서주임 유(유해진)씨에 대한 공판은 오는 2월 3일 오전 10시 서울지법 제4호 법정에서 개정될 것이라 한다.

 

<동아일보 1955. 1. 28> 오는 3일 첫 공판, 전 신창지서주임사건

양민 70여 명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전 충남 신창지서주임 유해진(31세)에 관한 “살인” 및 “사형금지법 위반” 등 피고사건 제1회 공판은 오는 2월 3일 상오 10시 서울지법 제3호법정에서 김진권 부장판사 주심으로 개정될 예정이라 한다.

 

<경향신문 1955. 2. 25> 기소사실을 부인, 전 신창지서주임사건 공판

150여 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는 혐의로 앞서 기소되었던 유해진(전 신창지서주임)에 대한 제2회 공판은 24일 상오 11시 지법 제4호 법정에서 김(김진권)부장판사 주심리에 개정되었다.

이날 공판에서 유피고는 기소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하면서 검사의 기소장은 모두 틀렸다고 기이한 발언을 하여 주심판사를 당황케 하였다.

피고 유는 자기가 신창지서주임으로 있을 당시 양민과 부역자를 사형(私刑)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사형한 일은 전연 없다고 부인하였다. 또한 동 피의자는 돈을 받고 구치된 부역자를 석방한 사실도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날 상오 공판은 피고의 기소사실부인으로 시종일관하였다.(12시 현재)

 

<동아일보 1955. 2. 26> 매장지를 현장조사, 유의 양민학살전적부인으로, 신창지서사건

양민 1백여 명을 살해하였다는 혐의로 앞서 서울지법 공판에 회부된 전 신창지서 주임 유해진(31) 피고에 관한 “살인”, “수회”, “사형금지법위반” 등 피고사건 제2회 공판은 24일에 개정되어 상오 하오에 걸쳐 사실심리가 진행되었는데 이날 유 피고인은 기소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하여 주목을 끌었다.

유 피고는 검찰청에서 조사받을 당시 피고사실을 시인하던 태도를 돌변시키고 기소사실을 전적으로 부인하여 요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4후퇴 수복 후 신창에 돌아오고 보니 우익단체(대한청년단, 소방대 등)에서 부역혐의자로 8백여 명을 감금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중 6백여 명을 인수받았다. 그후 나는 온양경찰서장과 사찰주임의 지시에 의하여 움직였을 따름인데 2‧3차에 걸쳐 전기 9백여 명 중 60여 명을 본서로 압송하였으며 1회에 50여 명씩 총살을 집행한 사실은 없으며 또한 석방을 청탁받고 금전을 수회한 후 피의자를 석방한 사실은 나에 대한 모략이며 수복 후 공포한 번 쏘아 본 사실조차 없다.”

이날 공판은 하오 3시에 일단 사실심리를 끝마치고 증거채택에 들어가 변호인 측에서는 전 내무장관 조병옥씨 백성욱씨 그리고 전 법무장관 조상관씨, 전 국방장관 신성모 씨 등을 비롯하여 20여 명을 증인으로 신청하였는데 재판장은 전 장관에 대한 증인신청은 직권으로 각하하고 그중 사건에 직접 관련된 증인 3명만을 채택하였다. 또한 검사 측 증인 1명과 재판장의 직권에 의하여 당시 온양경찰서장 오치운 경감 외 2명을 각각 증인으로 채택하는 한편 불원 사건 현장에 출장하여 총살하여 시체를 매장하였다는 현장과 기타 증거를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경향신문 1955. 4. 1> 증인심문을 개시, 전 신창지서사건 3회공판

…공판개정 즉시 재판장은 전회 공판에서 증인으로 채택된 박길영, 김대운, 홍승녹, 윤해식씨에 대하여 증인 심문을 시작하였다.…

 

<동아일보 1955. 5. 6> 유에 사형구형, 신창양민학살사건

…이날 김검사는 “부역자와 부역자의 가족이라고 하여 1백여 명에 달하는 국민을 살해한 악랄한 피고의 범행은 국민으로 하여금 처참과 공포 속에 쌓이게 하였다”는 요지의 준렬한 논고에 이어 피고에게 “사형”을 구형하였다.…

 

<동아일보 1955. 5. 26> 유해진에 징역 15년, 신창양민학살사건 언도

…지난 25일 상오 서울지법 제4호 법정에서 개정되었는데 이날 판결에서 재판장 김진권 판사는 유 피고에게 “징역 15년”을 언도하였다. 동 사건에 대한 담당 김익보검사의 구형은 “사형”ㅣ었다. 그런데 이날 김 재판장은 그 판결이유에서 양민을 살해한 사실을 일부 인정하였으나 사변 중의 혼란기였던 관계로 특히 정상을 참작하고 한편 횡령 등 사실도 인정 경합범으로서 “실형 15년”을 언도한다고 하였는데…

 

<미군폭격 피해>

 

아산지역은 1‧4후퇴 시기 미군의 폭격에 의한 피해도 있었다. 경기 평택과 접하는 둔포에는 1951년 1월 8일 밤 김포지역 등에서 온 피난민들 추위를 견디기 위해 양곡창고에서 모여 모닥불을 피워놓고 쉬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전투기의 공격을 받았는데, 당시 둔포를 경기도 군포로 잘못 알고 폭격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당시 희생자 수는 3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미 25사단 27연대가 평택에서 작전 중이었으며 보급로 확보를 위해 피난민 통제를 사단 본부에 요청하고 있었다.

 

이상 아산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온양읍 풍기리

온양경찰서

부역

1950. 10.

성재산 방공호 등

200

온양경찰서

부역

1950. 10.

지서뒷산 방공호

90

탕정지서

부역

1950. 9.~10.

염치면 새지기

염치지서

부역

1950. 10.~11.

선장면 쇠판이골

30

선장지서

부역

1950. 10. 20.~22.

옥목리 앞산 등

100

신창지서

1‧4후퇴

1951. 1. 7.~8.

배방면 폐금광 등

300

배방지서

폭격

1951. 1. 8.

둔포

300

미군

피난민 포함

1‧4후퇴

1951. 1. 9.~15.

매봉산 골짜기 등

150

신창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