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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서산지역사건 종합

2013.07.23 22:03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057

<국민보도연맹사건>

 

서산(오늘날 당진의 대호지면과 정미면은 당시 서산군 관할이었다)에서는 수백 명의 주민들이 1950년 6월말 예비검속되어 7월 10일(또는 12일) 성연면 일람리 메지골에서 집단희생 되었다. 경찰이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을 메지골로 끌고 가는 모습이 목격되었는데, 끌려가던 주민들은 양손을 뒤로 묶인 채 허리 부분이 서로 엮어져 있었다고 한다. 현장에 시신들이 30미터정도 길게 널려 있었고 몇몇은 총상을 입었음에도 살아서 산을 내려갔다고 한다. 서산경찰서는 7월 12일 후퇴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서산·태안지역은 인민군 후퇴 시기에도 주민 피해가 컸다.

서산내무서와 태안내무서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1950년 9월 25일부터 30일 사이에 양대리 포구, 소탐산 등에서 희생되었다. 서산경찰서 수사계 이씨(이재병)는 1981년부터 1983년가지 좌익세력에 의한 집단희생사건을 조사했는데 희생자가 약 350명이었다. 서산지역의 인민군은 9월 30일 후퇴했으며 같은 날 함포사격지원을 받은 국군이 태안 근흥면으로 상륙했다. 한편, 서산지역에 있던 인민군 측은 9월 30일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서산내무서 소원분주소에 감금되었던 주민 30여 명 중 18명이 10월 9일 학살당했으며, 같은 날 모항리에서도 염전창고에 갇혔던 주민 19명이 학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두 사건 모두 인민군이 퇴각하고 지방좌익들만 남아 있다가 감금된 사람들을 창으로 살해한 뒤 석섬 등으로 피신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서산에 국군이 진입한 날이 9월 30일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사건 발생 시기에 모순이 있다.

 

<부역혐의 피해>

 

서산지역은 국군의 수복 후에도 많은 주민들이 부역혐의로 희생되었다.

1950년 9월 30일 인민군 후퇴와 동시에 국군이 태안 근흥면으로 진입했으며, 서산경찰서는 10월 7일 미 9사단과 함께 복귀했다. 서산경찰서는 수복 후 치안확보를 위해 대한청년단 등 우익단체와 협력을 바탕으로 주민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서산읍과 서산군 각 면에서 이송된 주민들이 서산경찰서 유치장과 읍사무소 창고 등에 구금되었다. 서산경찰서의 『경찰 연혁』에는 “경찰 환주 후 2개월간에 부역자 1천여 명을 검거 송치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연행된 1천여 명의 주민들은 가ㆍ나ㆍ다로 분류되었는데 ‘가’로 분류된 사람들은 갈산리 교통호와 수석리 소탐산에서 살해되었다. 서산읍 읍내리에 거주하면서 서대복(서산군 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의 가족 5명이 10월 15일 서산경찰서로 끌려가 희생되었으며, 서대복은 10월 19일 희생되었다.

 

서산경찰서 외에 각 지서에 의해서도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집단희생되었다.

 

고북면에서는 치안대에게 연행된 고북면 주민들이 양조장에 감금되어 고북지서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취조를 당했다. ‘처형’으로 분류된 주민들은 장승고개, 고북지서 뒤, 해미면 반양리 옻걸이에서 지곡지서 소속 경찰에게 살해됐다. 주민 이승무가 10월 24일 고북지서 뒤에서 살해되었고 그의 시신을 지서 뒤에서 수습했다.

대호지면(현 당진군)에서는 서산경찰서로 이송되지 않은 주민들이 10월 29일경 지서 뒤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1·4 후퇴 연행된 주민들은 양대리 바닷가에서 희생되었다.

 

정미면(현 당진군)에서는 정미지서(천의지서) 지서장의 명령에 따라 치안대와 의용경찰이 주민들을 연행하여 정미면사무소 옆 곡물창고에 감금했다. 당시 창고에는 100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다. 12월 5일 새벽 1시 최덕구 등 10여 명이 경찰에 의해 끌려 나가 똑때기 터 아래 갯골에서 총살당했으며 12월 25일 다시 10여 명이 똑때기터 갯골 맞은 편 함박골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서산경찰서로 이송되어 메지골에서 15명이 희생되었으며, 도산리 갈골에서 20여 명, 똑때기터 아래 갯고랑과 함박골 골자기에서 2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된다.

 

지곡면에서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은 부성국민학교에 구금되었다. 이중 ‘가’급으로 분류된 주민 일부는 지곡면 화천리 공동묘지에서, 일부는 서산경찰서로 이송 중 또는 이송 후 갈산리 교통호에서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10월 23일 지곡지서에 구금되었던 이시우 등 10여 명을 트럭에 싣고 서산경찰서로 이송하던 중 갈산리 교통호에서 총살했다. 부성국민학교에 구금된 주민들은 지곡지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에게 취조를 받았는데, 이 중 일부는 심한 구타와 고문에 의해 살해당했다. 산성리 김기호는 부성국민학교에서 보초를 서면서 감금된 주민들이 지곡지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원들에게 몽둥이로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이종목은 한재봉이 구타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로 들것에 실려 이송되는 것을 목격했다. 한석현도 부친 한재봉과 함께 부성국민학교에 구금되었는데 자신도 취조를 받을 때 지곡지서 소속 의경 최종운에게 몽둥이로 구타를 당했고, 아버지도 거동하지 못할 정도로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또한 조한권은 부성국민학교에 구금되었던 부친 조호석에게 밥을 전달하던 중에 머리에 피를 흘리며 복도로 걸어 나오는 아버지를 목격했다. ‘처형’으로 분류된 주민들이 지곡면 화천리 공동묘지로 이송되어 살해되었다.

 

해미면 주민들은 양조장과 해미지서유치장에 감금되었다. 취조가 끝난 주민들은 지서로 옮겨졌고 취조내용을 근거로 ‘처형’과 ‘훈방’으로 분류되었다. ‘처형’으로 분류된 주민들은 10월 24일경 해미읍성 동문 밖 방공호와 인근 교통호에서 살해되었다. 이외에도 소탐산과 고북면 장승고개에서도 일부 주민들이 살해되었음이 확인되었다.

 

<1‧4 후퇴 시기 피해>

 

서산지역에서는 1‧4 후퇴시기 인민군의 점령 위협을 받지 않았음에도 이들에게 협조할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주민들이 총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소탐산에 거주하고 있는 한씨(한영동)는 국군 수복 후에 뒷산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는데 1‧4후퇴 시기에도 경찰이 주민들을 총살하는 소리를 들었다. 경찰이 집 앞으로 트럭에 삳고 주민들을 끌고 간 후 1시간 동안 총소리를 들었다. 태안경찰서 소속 경찰 정씨(정동수)도 서산경찰서 소속 경찰이 “급해서 그냥 끌고 갈 수 없으니까 (부역자들을) 소탐산에서 죽였지.”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마을 주민들은 “사람들을 뒤로 앉혀 놓고 총살했다”는 증언을 했으며, 해미면 홍천리 전씨(전재기)는 친척의 시신을 수습하러 소탐산에 갔을 때, 수십 구의 시신이 골짜기에 쌓여있는 것을 목격했다. 서산경찰서의 『경찰 연혁』에는 “38선 이북까지 진출하던 유엔군은 중공군의 대거 남침에 수반하야 재차 후퇴를 하게 되었으니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어 기왕 후퇴하려면 적색분자를 살해하고 후환이 없도록 하라는 여론은 중천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상 서산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10.

성연면 메지골

100

서산경찰서

인공

1950. 9. 25.~10. 9,

양대리 포구, 모항리

350

인민군

부역

1950. 10.~12.

갈산리 교통호 등

1,000

서산경찰서

1‧4후퇴

1950. 1.

수석리 소탐산

서산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