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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금산지역사건 종합

2013.07.22 23:26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469

금산지역은 1963년 충청남도에 편입되기 전까지 전라북도에 속해 있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금산에서는 경찰서 유치장과 인근 연초창고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이 1950년 7월 20일경 전북도경찰국과 CIC의 지시에 의해 트럭에 실려 부리면 현내리 윽박골과 남일면 음대리 금일초등학교 인근 냇가에서 희생되었다. 금산경찰서 근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윽박골에서는 100여 명, 남일면 음대리에서는 40~50명이 총살당했다. 한편, 당시 금산지역의 희생자 수가 1,500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이 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 후퇴시기에 주민들이 후퇴하는 내무서원들에 의해 집단희생되었다. 9월 25일 금산내무서에 감금되었던 주민 43명이 군북면 호티리 비비미재에서 희생되었다. 인민군은 9월 26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

 

<부역혐의 피해>

 

국군 수복 후에도 주민들의 집단희생이 계속되었다. 부역혐의를 받아 금산경찰서 유치시설에 갇혀 있던 주민들이 비비미재 골짜기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희생자 수는 3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의 희생사실은 금산경찰서에서 작성한 『처형자명단』(1973)과 『사실조사서』(1981)에서 확인된다.

 

<토벌 피해>

 

험준한 산악지형인 금산지역에는 금산경찰서에 의한 피해 외에도 각 지서와 토벌부대에 의한 희생이 잇달았다. 남이면 흑암리에 진입한 토벌부대는 마을 주민들을 회관 앞으로 집결시킨 후 부역자를 색출하여 연행하려고 했다. 그러자 김제봉, 김제열이 이에 저항하였고, 토벌대는 이들을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 내일량에서는 백배동 등 4명이 군인들에게 총살당했다. 남일지서는 음대리 양조장에 주민들을 감금하여 조사한 후 남일초등학교 뒤 골짜기와 초현리 골짜기에서 집단학살했다. 금산경찰서 『처형자명단』(1973)과 『사실조사서』(1981)에서 남일 주민들의 희생사실이 확인된다. 진산면 안이랭이에서는 마을 소개를 피해 산으로 피신했던 백동이가 군인에게 사살당했다. 마을은 모두 불태워 졌다.

 

부리지서에는 150여 명의 의용경찰이 조직되어 있었으며 지하에는 4개의 벙커가 있었다. 국군 수복 후 끌려 온 주민들은 지하 벙커에 감금되었다가 금산경찰서로 이송되거나 현내2리 부처당 암자 골짜기에서 집단희생되었다. 한편, 어재리 형석굴에 피신 중이던 주민들은 부리지서 경찰에 의해 불타 죽었다. 이 사실은 부리지서가 만든 자료인 『비상조치자명부』에서 확인된다. 평촌리 길명렬은 길준석의 삼촌이라는 이유로 1950년 11월 5일 부리중학교 뒤 지하벙커에서 희생되었으며, 어재리 장철현, 길준철이 『처형자 명단』에서 확인된다. 1951년 2월에는 어재리 길준석, 길재순이 경찰을 피해 형석굴에 숨어 있었는데 경찰이 굴 입구를 바위로 막아 놓고 불을 질러 굴속에서 질식해 사망했다. 부리지서에서 작성한 『부역자 검거 처리 현황 실태표』, 『부리면 사살자 명부』에 따르면 부리면에서 검거된 부역혐의자 359명 중 8명이 형석굴에서 희생되었다.

 

이상 금산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20.

부리면 윽박골 등

150

CIC, 경찰

인공

1950. 9. 25.

군북면 비비미재

43

인민군

부역

1950. 10.

군북면 비비미재

300

금산경찰서

부역

1950. 10.~11.

초현리 골짜기 등

각 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