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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청원지역사건 종합

2013.07.22 23:13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257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고 7월 2일에서 8일 사이 북이면 주민들이 북이국민학교 교실에 감금되었다. 소집 당일 저녁, 경찰들은 간부를 제외한 주민들에게 ‘밥 먹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며 내보내기도 했는데, 도망갈 기회를 주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순진하게 다음 날 다시 집결한 주민들은 7월 9일 청원군 북이면 옥수리 옥녀봉 등에서 희생되었다.

 

청원군 오창면 오창창고에는 진천과 청원 오창면에서 연행된 500여 명의 주민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7월 10일 오창지서와 오창창고 등에 갇혀 있던 진천과 청원 오창지역 주민 10여 명이 수도사단(사단장 김석원) 헌병대에 의해 사살 또는 폭행치사 당했다. 이날 저녁에 군인 2명이 창고에 와서 군인가족을 나오라고 한 뒤, “동생하고 싸우려고 빨갱이 짓을 했느냐”며 총 개머리판으로 주민 3명을 때려 죽였다. 이어 밤에는 헌병과 경찰이 지서 유치시설에 별도로 갇혀있던 주민 10~15명을 끌고 가 한 명씩 권총으로 사살했다. 이들은 경찰의 조사과정에서 마을의 책임자급으로 판단된 주민들이었다고 한다. 이날 밤 수도사단 헌병들은 오창창고에 주민들을 가두어 둔 채 오창지서장에게 이들을 인계하고 후퇴했다. 당시 창고에 갇힌 주민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10일 밤을 지새웠다.

 

7월 11일 새벽 2시경 오창에 도착한 6사단 19연대 헌병대 10여 명은 창고에 감금된 주민들이 국민보도연맹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관총과 수류탄까지 사용하며 주민들에게 살해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총 쏘기를 일시 중단한 군인들이 ‘산 사람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앞으로 나오라’고 소리치자 생존한 주민들이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걸어 나갔다. 그러자 군인들은 이들에게 다시 총을 쏴 살해했다. 이날의 희생자는 400여 명에 달했다.

 

같은 날 오전 8시 30분 인민군이 진입했다며 수도사단이 폭격을 요청했으므로 이에 미 전투기가 오창창고를 폭격하였다. 한편, 7월 10일에 진천전투가 있었으며 인민군은 7월 11일 오후에 오창에 진입했다. 한편, 인민군 점령 후 7월 20일경 이로 인해 의용소방대장 김씨가 인민재판에 의해 처형되는 일이 발생했다. 인민재판 당시 김씨의 죄목은 ‘수도사단의 후퇴 후 주민들을 풀어주려는 오창면장의 열쇠를 빼앗아 이를 막았으며 그 결과 주민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는 것이라고 한다.

 

 

(청원 분터골 유해발굴 모습)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국군은 7월 12일 청원군 오창읍 화산리와 오근장의 인민군에게 포격을 가했으며, 13일에는 미호천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7월 14일부터 17일까지 청원군 남일면에서 전투를 치르고 보은으로 후퇴하였다.

 

<부역혐의 피해>

 

청원의 수복은 1950년 9월 29일 가덕면에 진입한 국군 1사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국군은 가덕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가덕면내 31개 마을과 이웃인 남일면 문주리 등에서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 100여 명을 색출하여 연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행정리 주민 남상열은 마을 앞마당에 모여 있는 동안 군인들에 대한 태도가 나쁘다며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 나머지 연행된 주민들은 병암리에 있던 가덕지서와 가덕국민학교로 집결되었다가 지서 앞 방공호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국군에 의한 학살은 10월 2일까지 계속되었다.

 

<미군폭격 피해>

 

국군의 후퇴와 함께 인민군의 점령이 동시에 진행되던 지역에서는 미군폭격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가 대규모로 발생했다. 미군은 1950년 7월 12일 조치원 북방에서 패전당한 미 24사단을 금강선으로 집결시키고 있었으며 국군 수도사단은 7월 13일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와 국사봉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인민군은 7월 14일 청주를 점령하였고 그 선발대는 청원군 남일면까지 진출하고 있었다.

 

7월 14일 청원군 현도면 하석리 강변에서 피난민들과 수도사단 7연대(김석원부대) 병사들을 싣고 건너던 배들과 인근의 피난민들이 1시간에 걸친 미군 전투기 4대의 네이팜 폭격과 기총사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100여 명이 사망했는데, 목격자들은 당시 희생자들대부분이 서울과 경기지역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배에 타고 있다가 공격을 받았던 생존자 증언에 의하면, 당시 미군은 이 날 12시 이후부터 뱃길을 끊을 것이며 배를 띄울 경우 폭격한다는 지시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퇴하던 국군 2명이 배를 띄우라고 명령했고 이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배를 띄우게 된 것이라 한다.

 

한편, 폭격을 당한 배들은 군인들의 후퇴를 위해 군인들에게 징발당한 것이므로 사건 당시 상당수의 수도사단 군인들이 이 배들에 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목격자들의 증언으로 보아 사건 당시에 군인들은 정작 이 배에 타고 있지 않았다. 군의 후퇴작전 보다 더 급했던 민간인들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폭격당할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던 군인들이 피난민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이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상 청원지역에서 확인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은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9.

북이면 옥녀봉

1,000

괴산과 중복

보도연맹

1950. 7. 10.

오창창고

20

수도사단

보도연맹

1950. 7. 11.

오창창고

400

6사단

폭격

1950. 7. 11.

오창창고

미군

폭격

1950. 7. 14.

현도면 하석리 강변

100

미군

부역

1950. 9. 29.

가덕면 방공호

100

1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