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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진천지역사건 종합

2013.07.17 12:53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1417

<국민보도연맹사건>

 

진천은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 이후 1949년 11월까지 1,627명이 전향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충청북도에서 가장 많은 것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충북경찰국은 무선통신을 통해 국민보도연맹원을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려보냈고, 진천경찰서 사찰계는 전화를 통해 이를 각 지서에 전달했다. 이후 소집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진천경찰서 유치장 등으로 이송되었다. 조기 소집된 보도연맹 간부 10여 명은 6월 30일 진천면 성석리 할미성 고개에서 사석출장소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얼마 후 2사단 16연대로 추정되는 군인들이 진천경찰서로 들어왔다. 이들은 “그냥 두고 내려가면 보도연맹원들이 일어나 피해를 볼테니 모두 처리하고 가야한다. 군이 처리할테니 색출은 경찰이 하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 때 연행된 주민들은 7월 6일경 진천면 성석리 ‘할미성 고개’와 문백면 옥성리 ‘말부리 고개’, 덕산면 신척리 ‘구시울 골짜기’ 등에서 학살당했다. 이와 별도로 덕산면 주민 10여 명은 7월 13일 덕산면 신척리 구시울 골짜기에서 총살당한 사건과 백곡면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이 확인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진천경찰서 수사과 근무자 김씨(김수동)에 의하면 경찰과 국군은 7~8명이 한 조를 이루어 직접 주민들을 색출한 후 마을 인근에서 총살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진천에는 7월 6일 후퇴하던 혼성 수도사단 1연대가 진입했는데, 7일에는 진천을 중심으로 피아간의 병력이 집중되었으며, 이때 민간인 신분이었던 김석원이 군단장에게 사전 연락도 없이 새로운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인민군은 7월 8일 진천 시내를 점령했으나 전투는 7월 9일과 10일로 이어졌으며 미군의 지원 폭격이 있었다.

 

<부역혐의 피해>

 

국군에 의해 진천이 수복된 후에는 부역혐의를 받았던 주민들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당시 진천경찰서 유도장에는 광목으로 뒷결박된 주민 30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다. 이들은 어느 날 경찰에 의해 봉화산에서 총살당했다. 초평면에서는 초평초등학교 교사였던 용정리 김호정이 치안대에 잡혀 초평지서로 연행된 후 10월 26일경 살해당했다. 시신은 초평지서로부터 연락을 받은 가족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이상 진천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6. 30.

성석리 할미성고개

10

경찰

보도연맹

1950. 7. 6.~13.

할미성, 말부리고개 등

부역

1950. 10.

봉화산

30

경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