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배 장군 전기, 김병권 저, 도서출판 예가, 2010년)

 

... 그래서 서부전선의 모 부대는 적에 맞서 저항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31쪽. 채명신 추천사)

 

... 전쟁 초기의 그는 6사단 7연대 1대대장으로 '춘천 지내리전투'에 참가하여 적을 무찌르고, 북진 시에 압록강 초산에 가장 먼저 진출하여 적진을 점령하는 전공을 세웠다. 전쟁 발발 후 전사할 때까지 ... 일선 연대장으로서는 유일한 전사자이다.(38쪽)

 

특히, 1949년 5월 4일 춘천에 주둔한 제8연대 제1대대장 표무원 소령은 대대병력을 이끌고 야간행군을 빙자하여 월북하였다. 다음날에는 홍천에 본부를 둔 같은 연대 제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야간 전투를 가장하여 ... 북한인민군에 투항했다. 그 5일 뒤에는 해군의 508함정이 주문진 근해에서 경계임무 수행 중 월북하였다.(59쪽)

 

그렇다면, 지금까지 열거한 일련의 이적행위들을 살펴보면 누군가가 분명히 적과 내통했다는 심증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신성모 국방장관이나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이 그 혐의를 받을 수도 있다.... (70쪽)

 

(1950년 6월) 20일 밤, 연대 수색대장은 1개 분대를 이끌고 용화산에 침투하여 다음 날 04:00부터 적정을 살폈다. 화천-신포리 일대의 5번 도로상에는 약 400대의 차량이 줄지어 서 있고, 신포리 부근 모래밭에는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집결하고 있었다. ... 누가 보아도 곧 적의 공격이 닥쳐온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소름끼치는 상황이었다.(75쪽)

 

(6월 25일) 약 30분 동안에 걸친 맹렬한 공격준비 사격이 끝난 후 진지 바로 앞까지 바짝 육박한 적이 돌격을 개시했을 때에는 ...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77쪽) 

 

연대는 이날 05:00에 비상을 걸어 영외거주 장병과 외박 중인 병력을 소집하였다. 이때 작전주임 이남호 소령은 춘천역에 연락하여 07:00발 서울 행 열차에 승차한 외출 장병들을 모두 소집 복귀시킴으로써 병력 집결의 효과를 올렸다.(78쪽. 남침을 예상하면서도 장병 휴가는 보냈음)

 

그러나 적은 북한군 7사단의 증원을 기다리는 듯, 옥산포-마전리-우두산 일대에 전개한 공격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88쪽)

 

제6사단 7연대가 병력 화력 기동력 면에서 4배 이상으로 더 강한 북한군의 기습을 받은 상황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3일 동안이나 호각지세로 싸워 이 춘천을 지켜냈다는 것은 물리적 논증만으로는 불가능하다.(89쪽)

 

그들은 이러한 작전실패의 책임을 물어 군단장 김광협 소장을 해임하고, 그 후임으로 김무정 중장을 임명하였고, 7월 3일에는 7사단을 12사단으로 개칭하여 패전의 오욕을 씻으려고 안간힘을 쏟았다.(94쪽)

 

(1950년 7월 3일) 이 시기에 김용배 대대장이 소속된 제6사단 제7연대는 육군 본부의 철수 명령에 따라 곧바로 원주와 이천을 거쳐 다시 충주 일대까지 남하하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95쪽)

 

(7월 4일 7연대는) 출동에 앞서 확인된 병력은 장교 88명, 병사 1,626명이었다. 개전 초에 비하여 장교 31명, 병사 687명, 도합 718명의 사상자를 냈다.(97쪽)

 

낮 12시경 제1대대는 무극리를 여유 있게 점령하는 듯 보였지만 그러나 곧 후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하고 말았다. 장갑차를 앞세운 북한군 연대 규모의 병력이 저 후방에서 반격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106쪽)

 

 (7월 7일 음성)한편 동락리 전투 결과를 보고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이 전과는 표창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전사의 귀감으로 길이 기억되어야 한다'면서 건군이래 최초로 제7연대 전 장병에게 1계급 특진의 영광을 부여하였다.(111쪽. 17연대의 화령장전투 1계급 특진보다 먼저?)

 

9얼 22일, 7연대는 조림산을 점령 확보함으로써 계속 함창-충주선으로 진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 9월 30일, 1대대는 충주에서 부대정비를 하면서 다음 진격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159쪽. 6사단이 낙동강전선을 넘어 북진한 날은 9월 22일이었음을 보여줌)

 

 (10월 22일) 순천 근방에 이르렀을 무렵 하루 전에 미 187공수부대가 낙하, 적에게 포위되어 고전하고 있다는 급보를 받았다.(166쪽. 미 공수부대가 순천에 낙하한 날은 10월 21일)

 

(10월 25일) "설사 중공군이 있더라도 결코 대단한 존재가 아니니 멈추지 말고 계속 목적지까지 진격하라." 이 무렵 전선의 분위기는 부사단장뿐만 아니라, 사단장이나 군단장 또는 군 사령관까지 중공군이 개입할 시기는 지났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설사 개입한다 할지라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것으로 가볍게 여기는 실정이었다.(190쪽)

 

"압록강이다!" ... 1950년 10얼 26일 14:15, 국군은 드디어 대망의 국경선에 다다라 성취의 감흥을 맛보았다.(194쪽)

 

10월 27일 정오에 초산읍민들은 국군 환영대회를 성대히 거행하였다.(195쪽)

 

10월 27일, 7연대는 이날 12:00에 하달된 "회목동으로 이동하라"는 사단장 명령에 의하여 ... 10월 28일, 연대가 보급 추진의 지연으로 이동을 단행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2연대는 온정리에서 그 주력이 태평으로 이동하였으며, 19연대마저 진출을 저지당하고 있었다.(200쪽)

 

10월 29일 ... 그러나 이때는 이미 19연대마저 적의 포위에 빠지게 되었으며 중공군은 ... (201쪽)

 

 제7연대 예하 소총 및 중화기중대장 12명 중에서 살아나온 중대장 수는 반을 약간 넘었으나, 완전무장을 하고 자기 중대를 끝까지 지휘하면서 포위망을 뚫고 살아나온 중대장은 12명의 중대장 중에 오직 한사람인 제1중대장뿐이었다.(212쪽)

 

이때 연대는 2군단의 예비가 되어 북창 부근에서 정비에 들어갔으며, 당시 1대대 김용배 중령을 비롯한 각 대대장병 2,000여 명이 적의 포위망으로부터 탈출하여...(226쪽)

 

그래서 제1대대장의 비상소집명령이 나에게 전달된 것은 6월 25일 오전 8시 30분경이었다.(277쪽. 이대용 제1중대장 증언)

 

이런 비상소집은 그 전에도 심심치 않게 있어왔기에 새로운 일은 아니었다. 특히 야간에 북한공산군이 38선을 침범하여 아군이나 민가에 사격을 가하고 소란을 피우는 상황이 가끔 있었다.(280쪽. 앞 중대장 증언)

 

대한민국에 태극, 을지, 충무, 화랑 등의 무공훈장 제도가 생긴 건은 1950년 10월 28일로 ... (283쪽)

 

(동락리 전투) 제1대대는 이 전투에서 보현산을 야간에 점령한 후 배후공격을 가하여 패주하는 적 270명을 사살하고 6명을 포로로 하였으며, ...(2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