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식 정리 대필, Human & Books, 2002)

 

(1946년 10월 김천) 폭동이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서울에 있던 서북청년단의 청년들이 김천에 내려와 있었는데 이들로 인한 폐해 또한 만만치 않았다. 말보다는 주먹이 앞서는 사람들이라 닭 안 잡아준다고 몽둥이부터 먼저 날아가는 판이니, 순박한 농민들의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또 명분과 체면으로 살아가는 소위 '양반'들의 자존심은 완전히 구겨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무법천지였다. 내고 되고 싶어했던 면장도 이런 폭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59쪽)

 

소위로 임관된 후 첫 임지는 원주에 있는 보병 제8연대였다.(65쪽)

 

반격은 또 다른 반격을 낳고 분쟁이 커질 수가 잇어 웬만하면 그냥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불 같은 성격의 표무원 대대장은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박격포를 설치해라! 놈들의 중대본부를 묵사발로 만들겠다!" ... 나는 박격포를 직접 조작해 조준 사격을 포함해 10여 발을 쏘아 적의 중대본부 건물을 날려버렸다. 중대원들은 물론이고 표무원 대대장도 입이 함지박만하게 커지면서 좋아했다. (69쪽)

 

1949년 봄, 춘천에 주둔하고 있던 제8연대의 1대대장과 2대대장이 예하의 병사 각각 216명과 156명을 이끌고 월북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 주인공은 표무원 소령과 강태무 소령이었는데, 이 사건은 둘의 성을 따서 '강표 월북 사건'으로 명명되었다.(69쪽)

 

진주 사람이던 강태무와 마산 사람이던 표무원은 둘 다 일본군 하사관으로 근무했고, 해방 후에는 청년동맹 등에서 좌익 활동을 하다가 국방경비대사관학교 2기로 졸업하고... 38보안대의 활동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은 그 임무를 탁월하게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었다.(70쪽)

 

한데 1948년 가을부터 김창룡을 지휘부로 한 특무대를 중심으로 좌익 분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70쪽. 여순사건 발생 이전임에 주의. 단독정부수립 직후부터 숙군이 시작되었다는 증언도 있음)

 

아무튼 이 숙군 사업에 따라 좌익 활동 경력이 있는 강태무와 표무원도 숙군 대상이 되었고, 마침내 연대장 앞으로 체포하라는 명령서가 떨어졌다. 그러자 연대장은 고민에 빠졌다. 강과 표 두 사람은 38보안대에 맞서 탁월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70~71쪽)

 

이 일로 표무원과 강태무의 체포 명령을 철회해줄 것을 건의했던 연대장은 좌천되었고, 이 건의를 받아들였던 이응준 참모총장은 해임되었다.(75쪽)

 

강표월북사건 직후 ... 나는 제2대대 6중대장의 보직을 받아 충북 산악 지역에서 공비를 토벌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그 사건 이후 우리 제1대대가 맡고 있던 춘천 이북은 충주에 있던 제7연대가 춘천으로 이동하여 임무를 맡고, 제8연대는 ... 제7연대가 수행하던 충청북도 공비 토벌은 우리 연대의 임무가 되었던 것이다.(75쪽)

 

당시 미군이 쓰던 지도는 우리가 썼던 5만분의 1지도(대정 15년판의 일본 지도)는 산에 있는 큰 바위나 들판의 독립수까지 표시되어 ... (77쪽. 전쟁 발발 직전 국군이 보유하던 5만분의 1지도는 모두 회수되었다고 함.)

 

(단양) ... 그렇다고 해서 전과가 미미했던 건 아니다. 충북도당 책임자를 포함해 여섯 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포로로 잡았다.(79쪽)

 

1949년 여름부터 1950년 6월 20일경까지 우리 제8연대가 양구와 안제 사이에서 현리 동쪽의 방대산 능선까지의 광정면을, 제2대대와 제3대대가 각각 서쪽과 동쪽으로 나누어 경계 임무를 담당했는데 큰 피해나 사건은 없었다.(89쪽)

 

제8연대는 6.25 발발 후 적과의 숱한 교전 끝에 전체의 지휘관과 사병이 많이 죽고 부상당하는 바람에, 전체 연대 병력을 1개 대대로 축소해 제18연대로 흡수 재편되면서 영원히 사라졌다.(93쪽)

 

그때 대대장은 사관학교 2기의 이현진 소령이었는데, ... 이분이 1950년 4월 고등군사반 학생으로 떠나고 난 뒤 내가 대대장 대리로 있을 때의 에피소드이다.(113쪽. 당시 고등군사반에는 백선엽, 계인주, 최영희 등이 입교해 있었음)

 

한데 느닷없이, 우리 (6사단) 제8연대와 서울 용산의 (수도사단) 제2연대를 맞교대한다는 명령서가 날아들었다. 강원도 출신 병사를 주축으로 구성된 제8연대는 창설 이후 줄곧 강원도의 38선을 경비해왔는데 ... '비상경계 태세에서 이래도 되는가?" 현리에 있던 제3대대에 이어 우리 제2대대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전쟁 발발 이틀 전인 6월 23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전투 경험이 많은 우리 연대가 38선을 떠나고 전투 경험이라고는 전무한 제2연대가 38선에 배치된 것이다.(115쪽)

 

국방부의 수뇌부에 적의 스파이가 침투해 있었다는 가정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의구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자기한테 가까운 사람이나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너무도 관대하다. 더구나 과거의 일에 대해서는 ...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사실 관계가 밝혀지고 증명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116쪽)

 

(6월 25일) 그날 낮, 우리 대대는 독립 대대로 가평 북쪽의 화악산 옆으로 내려오는 적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곧바로 출발해 가평에 도착해 진지 편성을 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다시 명령이 내려왔다. 한강 인도교 좌우의 노량진과 흑석동 한강 남쪽에 진지를 구축하라는 것이었다. ... 우리가 밀리는 게 아니라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판 겨루는 전황으로 이해했고, 게다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이 곧 올라온다는 소식도 들렸다.(117쪽)

 

(6월 26일) 오후에 다시 명령이 내려왔다. 청량리 바깥의 야산, 지금의 경희대 자리에 부대를 배치하라는 명령이었다. 도무지 명령이 갈팡질팡이었다. ... 어쨌든 날이 어둑해질 무렵 우리는 진지 편성을 끝냈다. 그때 동북쪽으로 의정부에서 미아리로 통하는 길에 적의 탱크 부대와 보병이 이동하는 게 관측되었다. '큰일이다! 우리 뒤가 뚫리면 어떡하지?' ... (6월 27일) 적은 날이 새기 직전에 공격해왔다. 우리는 그야말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해가 뜨고 중천에 다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118쪽)

 

(6월 28일) 정오가 되었지만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탄약이며 포탄이 바닥난 가운데, 서울이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는 소문과 한강 인도교가 끊어졌다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 확인되지 않았다. ... 내가 천호동 다리(광진교를 말함) 를 건너자고 제안했다.(119쪽)

 

천호동 다리에 도착했지만 이미 다리는 끊어진 상태였다.(여기에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다리가 끊어진 지점은 강 북단의 두번째 교판이었다. 우리가 남으로 후퇴하는 입장이었으니까 끊으려면 다리 남쪽을 끊었어야 했다. 그래야 다리를 보수하려는 적을 향해 공격하기가 쉬울뿐더러 나중에 우리가 다시 공격해 올라갈 때 다르를 보수하기도 용이하기 때문이다. 다리 하나 폭파하는 데도 이런 전술적인 고려가 필요했는데 그러질 못했다.-저자)(120쪽. 광진교도 한강인도교와 마찬가지였던 모양임)

 

도강 작전 때 인민군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공격해오지는 않았다. 적은 소수인 데 비해 우리는 대대 규모의 전투 병력이었고 이미 강 저쪽에 화기를 배치해 놓은 상태라 섣불리 공격했다간 자기들도 만만찮은 피해를 볼 것임에 뻔했기 때문이었다.(121쪽. 6월 28일 시점에서 인민군의 공격이 중단된 것은 아닌지 의문임)

 

"적의 대부대가 도강합니다!" 과연 어둑어둑한 어둠 속에서 연대 규모의 병력이 도강 채비를 하고 있었다.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도강하려던 대부대는 인민군이 아니라 아군이었다.(121쪽. 이 부대의 소속은?)

 

밤새 행군을 한 우리 대대는 7월 6일(5일?) 날이 샐 무렵 오산 언저리에 도착했고 거기에서 미군 트럭을 만났다. 미군들 하는 얘기가 오산 북쪽에 미군 스미스 부대가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다며 2, 3일은 너끈히 버티어낼 것이라고 했다.(125쪽)

 

이 진천전투에서 개전 이래 처음으로 한국군에 지급된 105미리 '유담포'가 그 위용을 나타냈었다.(128쪽)

 

전열을 가다듬은 우리 8연대는 진천전투에 참가했다가 청주 남쪽의 고지를 점령하고 적의 공격을 하루이틀 막아낸 뒤 다시 보은으로 향했다. 그리고 상주에서 기차를 타고 김천을 거쳐 대구까지 이동했다.(130쪽)

 

(1950년 6월 28일 한강을 건너던 정승화 일가족의 일화) 한데, 남쪽 하안에 다다를 즈음에 갑자기 배를 향해 총알이 날아왔다. 남쪽에서 경계하고 있던 국군인 적인 줄 알고 사격을 가해온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여의도의 지금 국회의사당 있는 암벽 밑에 배를 대고 암벽을 기어 올라갔다.(133쪽. 영등포 방어선의 국군은 한강을 건너던 피난민을 공격하는 모습)

 

... 제8연대의 남은 병력으로 완전 1개 보병연대로 개편할 것. 1개 소총중대를 추가 편성할 것. 개편된 보병대대는 예천에 있는 수도사단 제18연대 제3대대에 편입할 것. 추가 편성한 소총중대는 제18연대에 인계할 것. 남는 병력은 사단 사령부에 인계할 것, 이상을 제18연대가 있는 예천으로 가서 신고할 것.(135쪽. 수도사단이 예천에 주둔했음)

 

'백골부대'란 명칭은 제18연대가 6.25 이전 수도사단에 속해 있을 때부터 제18연대의 별칭이었다. 이 제18연대가 인민군이 벌벌 떨 만큼 ... 2차 반격 때부터 제18연대의 예속이 수도사단에서 제3사단으로 바뀌자, 제3사단장이 '백골부대'란 별칭을 제3사단 전체의 별칭으로 삼았다.(137쪽)

 

9월 29일 우리 연대가 38도선에 이를 때까지 파죽지세였다. 이렇다 할 대규모 전투는 없었고 그저 패잔병들을 소탕하는 정도였다.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는 동안 우리는 82일 동안 살상과 지연 작전을 펼치며 상대하다가, 불과 14일만에 38선을 회복한 것이다.(164쪽)

 

... 한데 중공군의 출현으로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그때가 1950년 10월 30일이었다. 우리의 북진은 거기서 끝났다.(182쪽)

 

한데, 왜에앵 하는 소리가 나서 하늘을 보니까 경비행기 한 대가 선회 비행을 하고 있었다. 당시 포병 관측병이 경비행기를 타고 관측을 많이 있는데, 제공권은 우리가 장악한 상태였으므로 그건 적이 쏟아붓는 게 아니라 아군의 오인 포격이 분명했다. (1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