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_백선엽) 군과 나

2013.12.03 18:03

금정굴재단 조회 수:1798

(백선엽, 시대정신, 2009, 재출간. <길고긴 여름날, 1950년 6월>이라는 제목으로도 출간되었었음)

 

1953년 1월 31일 한국군 최초의 4성장군으로 진급(화보 1쪽)

 

 

 군과나_화보1.jpg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한국 해병대 1연대. 국군 17연대도 함께 상륙하였다.

(화보 3쪽. 국군 17연대는 9월 24일 상륙했음에도 마치 9월 15일 상륙한 것처럼 서술되고 있음. 국군 해병대가 상륙한 날도 9월 15일이 아니라 16일이었음)

 

개성은 벌써 함락되어 주둔하고 있던 12연대(연대장 전성호 대령)와는 통신도 끊겨버린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문산방면 13연대(연대장 김익렬 대령)는 현재 적과 교전 중이었고 수색의 11연대는 병력을 모아 전방 진지에 투입 중이라는 것이었다.(34쪽)

 

나의 관심사는 오로지 사단 좌익, 개성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정면을 담당한 12연대의 전력이 얼마나 남아, 유일한 통로인 임진강 철교 쪽으로 언제 철수할 것인지, 또 사단 우익의 고랑포 남족 파평산진지에 투입된 13연대가 얼마나 잘 버텨 줄 것인지... 나는 사단장 부임 직후 전선을 돌아보면서 방어 계획을 점검할 때 38선을 따라 일렬로 늘어선 전선의 부대 배치에 불안을 품고 유사시 임진강을 따라 저지선을 구축하도록 작전을 변경해 두었었다. 이것은 중요 도시인 개성을 일단 포기하게 되는 것이라서 일부 반대도 있었다. 

(35쪽, 한국전쟁사는 12연대가 임진강 쪽이 아니라 김포와 강화 방면으로 후퇴했다고 서술되어 있음. 실제 인민군 6사단은 포기된 개성을 통해 6월 25일 김포와 강화로 진입했음.)

 

오후 3시쯤 마침내 12연대장 전대령이 30~40명 부하들과 스리쿼터를 타고 철교를 건너왔다.

(37쪽. 연대장은 신임 사단장 백선엽이 변경한 작전계획대로 움직였음이 확인됨. 그렇다면 사병들이 김포와 강화로 후퇴한 이유는?) 

 

(26일) 저녁 무렵,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나는 마침내 현 방어선을 포기하고 모든 부대에게 후방 진지(봉일천)로 철수하도록 후퇴 명령을 내렸다. 무엇보다 우측 동두천 방면에 있던 7사단이 예상 밖으로 의정부쪽으로 일찍 후퇴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42쪽. 6월 26일 상황에 대한 기억으로 <한국전쟁사>는 같은 날 7사단이 동두천을 탈환했으나 후방인 의정부가 우회한 인민군에게 점령당할 위기였으므로 창동으로 후퇴한 것이라고 함. 따라서 이 기술은 7사단에게 후퇴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으로 보임)

 

고통과 초조한 마음으로 (26일) 밤을 새우고 나자 이때부터 적의 상황도 대체로 파악되기 시작했다. 사단 전면의 적은 전차로 증강된 2개사단 이상이었다.(44쪽, 인민군 6사단 일부는 후퇴한 12연대를 따라 이미 김포로 진입 했음-한국전쟁사)

 

...(전략)  "의정부 쪽은 끝장이 나 희망이 없다"는 말을 전했다. (27일 오후) 김장군(김홍일 소장)은 "여기서 일단 저항을 그치고 한강 남쪽으로 후퇴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의견을 물었다.(45쪽)

 

후일 듣자하니 김 장군이 채 총장에게 1사단 철수를 강력히 건의했으나 채 총장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 (중략)... 총장이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유가 있었다. 당시 채 총장은 미군이 곧 개입하리라는 정보를 얻고 적군을 한강 이북에서 저지하겠다는 일말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45쪽. 이승만이 대전에서 미군 참전소식을 들은 때가 27일 오후 4시반이었고, 채총장은 28일 새벽 2시쯤 한강인도교를 건넜음. 육군본부의 "진지사수" 명령이 27일 저녁 "늦게"였다는 회고는 곧 후퇴한 총참모장의 행동과 모순됨. 한편, 백선엽은 후퇴명령을 받지 않았다고 회고함.)

 

사흘 동안 밤낮으로 계속된 격투에 지친 아군은 28일 낮까지 봉일천 방어선을 지탱하고 있었다. ... 같은 날 새벽 3시, 한강인도교가 폭파되고 육군본부가 수원으로 이동 ... 나는 이런 사실을 알 턱이 없어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46~47쪽. 후퇴명령이 없었음을 증언함)

 

사단은 전력을 최대한 지켜서 한강 남쪽으로 철수하자. 목표는 우선 시흥 보병학교다.

(49쪽. 전투사령부가 시흥에 설치되어 있음을 알고 있음. 통신두절이 아니라면 후퇴명령이 없었다는 것과 모순될 수 있음.)

 

(28일) 날은 어둡고 앞길은 막힌 듯해 애써 가져온 지프를 강가에 버리고 논두렁을 따라 시흥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일행은 석주암 대령, 김익렬 대령, 최영희 대령, 헌병대장 이규광 소령 등 40~50명의 장병들이었다.(50쪽. 인민군 6사단 중좌(중령) 최태환은 개화산에서 12명의 장교가 탄 지프차를 잡았다가 세뇌교육을 시킨 뒤 풀어줬다고 회고한다. 이들 12명은 소령이 포함된 고급장교들이었다고 한다. 지프차 타고 후퇴한 국군 장교들로 이들 외에 확인되지 않는다. 출처, <젊은 혁명가의 초상>, 131쪽)

 

목표로 잡았던 시흥에 도착한 것은 6월 29일 동틀 무렵이었다. ... 보병학교를 찾아가니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돼 있었다. ... 김 장군은 내게 김포지구가 급한데 그리로 나갈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마음이야 굴둑같았지만 지휘할 병력도 없는 마당에 할 수 없는 일을 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었다.

(51쪽. 지휘할 병력도 없다고 함에 주목. 병력이 없던 계인주 대령은 28일 이미 실종된 상태임)

 

적군의 남침 초기 공격을 회고하건대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지점은 의정부 방면 7사단 정면과 문산 방면의 나의 1사단 정면이었다.(52쪽)

 

너무 초기에 무력하게 당하다 보니 당시 유사시를 대비한 국군의 작전 계획이 있었느냐는 논의가 나왔다. 이에 대해 나는 "분명히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5사단장 시절인 1950년 3월 어느 날 참모장 석주암 대령이 육군본부에 소집돼 방어작전 계획을 받아 왔었다. 그것은 적이 의정부 방면을 주요 공격 지점으로 침공해 올 것을 전제하여 대비책을 수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용이 빈약했다. 38선상에서 적을 저지하라는 것이었을 뿐 한강 이남에서의 계획은 없었다.

(53쪽. 앞 52쪽의 중요 지점이 의정부였던 것으로 보아 작전계획은 정확했다고 볼 수 있음. 실제 전쟁 초기 의정부 방면에는 7사단, 수도사단, 5사단 등 대규모 병력이 방어전투에 집중되었음.)

 

우리는 국군이 수원을 포기하고 육군본부가 대전으로 옮겨짐에 따라 평택을 거쳐 이날 조치원 쪽으로 내려가게 됐다. 내려가면서 오후 늦게 오산 근처 도로상에서 포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일단의 미군과 마주쳤다. 바로 미 24사단 선발대 스미스부대였다. 신형인 M2형 105mm포를 트럭으로 끌고 오는 것을 보니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럽기도 했다. ... 옹진에서 후퇴한 17연대(연대장 백인엽 대령)는 스미스대대와 함께 오산으로 왔다고 한다.

(59쪽. 7월 4일 상황으로 500여 명의 미군을 부러워했다는 회고가 진심일까? 2개 중대 병력을 스미스'대대'라고 부른 것도 의아하지만 상대는 최소 1개 사단규모의 인민군임을 몰랐을까?)

 

 이때부터 경부선 국도 쪽은 미군(24사단)이, 중부 및 동부 전선은 국군이 나누어 맡는 형식으로 지연전을 펴기 시작했다. 당장은 전세를 역전시킬 전력이 없기 때문에 곳곳에서 타격을 하며 최대한 시간을 끌어... 그 사이 우리는 미군과 연합군의 증파를 기다리기로 했다. ... 2,000여 명 가량의 도보부대를 이끌고 청주를 지나니...

(60쪽. 7월 5일 1군단 편성 후 상황임. 당시 1사단 등 6개 사단을 3개사단으로 통합 재편한 1군단의 병력수는 8,000여 명이었음. 당시까지도 보도연맹사건을 저질렀다는 회고는 없음)

 

증평에 도착하니 6사단 사령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 증평에서 부대를 점검하니 우리 병력도 5,000명 선으로 늘었다. ... 1사단은 6월(7월의 오자) 8일 백마령을 넘어 음성에서 6사단 7연대와 방어 임무를 교대하도록 돼 있었다. 음성에서 만난 임 중령은 동락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라 자신감에 차 있었다. ... "보다시피 우리 병력은 피로에 지쳐 있다. 포도 없고 중화기도 없다. 이대로 임무를 교대하면 위태로울 것 같다. 준비가 될 때까지 나를 좀 도와 달라."(60~61쪽)

 

17연대는 앞서 화령장(상주군 화서면 소재) 북쪽에서 국군을 추월해 내려오던 적 15사단을 매복 공격하여 크게 성과를 내 3,000여 연대 장병 전원이 1계급 특진해 있었다. ... 1사단은 7월 23일부터 17연대 및 미 24연대와 연합하여 갈령을 넘어 내려오는 적군 15사단 주력을 공격, 상당한 성과를 냈다. ... 7월 25일부로 미 24연대에게 넘겨주고 상주로 모여 조직을 재편한 후 함창으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61~63쪽)

 

26일 낮 상주에 도착하자 20연대와 청년방위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을 사단에 흡수하니 병력은 단숨에 7,000명 이상으로 늘었다. 또 포병 17대대가 배속되면서 총이 없는 병사들에게 모두 M1소총과 카빈이 지급됐다.(63쪽. 그 동안 소총이 없는 병사가 있었다는 회고)

 

오키나와 가데나 공군기지에서 날아온 B-29 5개 편대 98대가 모두 3,234개, 총중량 900t의 폭탄을 퍼부었다. ... 이때 적의 주력부대는 이미 낙동강을 넘어 우리와 근접 대치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치명적 타격은 피한 것으로 판명됐으나 ... (77쪽)

 

공격 개시 4일째이던 9월 19일 나는 다부동 북쪽 군위로 향하는 길에 나섰다. ... 고랑포에서 우리 1사단을 패배시켰던 적군 1사단은 여기서 '패배'차원이 아니라 완전히 '와해'되어 형체를 잃게 됐다.(95쪽. 국군 1사단 방어지역을 공격한 인민군은 6사단이었다는데...)

 

다부동에서 적군을 섬멸한 우리 1사단은 상림동과 상장동에 진출해 ... 이곳으로 온 지 사흘 만인 9월 22일 나는 신주막 삼거리에서 상주 쪽으로 향하는 미군 부대를 만나게 됐다. ... 군단의 명령은 "남은 적을 소탕하며 군위를 거쳐 청주로 진출하라'는 것이었다.

(100~101쪽. 예비사단이었으므로 북진 못함)

 

군위에 와 보니 마을은 온통 폐허가 되었고 적군은 벌써 달아난 후였다. 우리는 선산에서 낙동강을 건너 석 달 전 후퇴했던 코스를 거슬러 상주~보은~미원을 거치며 약 1주일 동안 주로 속리산 일대에 숨어 있는 적을 소탕했다.(103쪽. 토벌작전으로 경북 상주, 충북 괴산 청원 보은 일대에서 민간인학살 사건을 일으킴)

 

 1사단은 고랑포를 38선 돌파 공격을 위한 집결지로 정하고 10월 6일 청주를 떠났다. 우리는 이틀 만에 마포나루 건너편 여의도 도하 지점에 이르렀다.(108쪽)

 

고랑포에서 나는 뜻밖의 사건을 만났다. 그것은 임진강 전투에서 남하하지 못해 서울에 잔류했던 장병 100여 명이 부대를 찾아 '지각 합류'한 거이다. 일면 반갑기도 하고 일면 유감스러운 심정이 있었음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한강을 건너 탈출하지 못한 각자의 어려운 사정이 있었을 것이나 특히 장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본대에 합류했어야 했다. 일부 참모들 중에는 이들이 탈출하지 못한 경위를 조사해야 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110~111쪽)

 

공비토벌의 여파로 적지 않은 고아가 발생한 것도 문제였다. 부모를 잃은 공비 및 입산자 자녀들까지 우리가 돌보지 않으면 안 됐다. 당시 이을식 전남지사의 도움을 얻어 송정리에 있는 적산가옥을 고아원으로 바꿔 나와 참모들이 상당 기간 운영을 도왔다. 당시 종군기자로서 후일 세계 선명회 총재가 된 피어즈 박사도 수많은 고아의 양육을 도왔다.(27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