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흥(全載興, 1927년생)은 국군 수복 후인 1950년 10월, 아무런 관련이 없었음에도 인민군 측에 의한 집단학살 사건인 서천등기소사건에 연루됐다며 서천경찰서로 연행됐다. 대전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갇혀 있던 중 1951년 3월 4일 총살당했고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 후 재심을 청구하여 62년만인 2012년 무죄가 선고됐다.

▲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전재흥 선생의 사진. 얼굴의 오른쪽 부분이 찢겨져 사라진 것을 복원했다고 한다.

서천 시초면에서 태어나다

전재흥은 1927년 2월 18일 충남 서천군 시초면 선동리에서 부친 전봉준과 모친 구덕환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농이었던 전봉준은 마을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양식을 풀어 어려운 이웃을 도와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62년 그의 장례식 상여 행열이 끝이 없어 “죽은 군수보다 호상꾼들이 더 많았다”는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모친 구덕환은 마을 대성이었던 구 씨 집안으로 서천에서 좌익으로 유명했던 구재극과 같은 집안이었다고 한다.

전재흥은 일제강점기 어려서부터 돈을 벌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해방 후 귀국했다고 한다. 귀국할 때면 마을 청년들을 모아 산에서 나무를 했으며, 남편을 징용 보내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힘들게 살아야 했던 이웃 아주머니들 집에 이 나무들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런 활동은 해방 후 항일운동가, 반일희생자와 그의 가족을 지원했던 ‘반일운동자 구원회’의 활동 내용과 비슷한 것이었다.

서천의 해방과 전재흥

해방이 되자 귀국한 전재흥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딸 전 씨는 어머니로부터 전재흥이 해방 직후 생긴 인민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죽음을 당하게 됐던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948년 분단 정부의 수립은 서천지역에서도 극단적인 갈등을 불러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경위는 파악되지 않지만 전재흥 역시 경찰에 쫓겨 다녔다고 한다. 딸 전 씨가 태어나던 1949년 1월 전재흥은 산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이미 두 자식을 잃은 전재흥은 셋째의 순산 소식을 듣고 3일 뒤 산에서 내려왔다가 경찰에 잡혀갔다.

남편이 시초지서로 잡혀가자 산후조리하던 아내 장 씨가 아픈 몸을 이끌고 지서로 찾아갔다. 남편은 의자에 묶인 채 매를 맞고 있었고 이를 본 장 씨가 두 팔로 가로 막았다. 출산 사실을 알고 있던 경찰은 장 씨를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장 씨는 굶은 채 그 자리에서 3일을 버텼다. 대소변도 그대로 서서 해결했으니 지서 경찰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남편을 풀어 주었다고 한다. 딸 전씨가 성인이 된 후 찾아 온 어머니 구 씨가 아버지에 대해 밤을 새우며 해 준 이야기였다.

풀려난 전재흥은 이날 이후 딸의 앞 날을 생각하며 반정부 활동을 그만 두었다고 한다. 유족들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전재흥에게는 대전형무소로 가던가 아니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던가 둘 중 하나의 길을 택해야 했을 것이다. 체포 후 농사 일에만 전념하기로 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뒤의 방안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동생 전재원(1929년생)은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다가 경찰에 들어갔으나 좌익활동과 관련되어 사직당했다고 한다. 이후 지하활동을 하면서 숨어다녔는데 형수 장 씨에게 부탁해 늦은 밤 몰래 동료들의 밥을 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좋은 세상에서 보답하겠습니다”, “형수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한다. 형은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때까지도 동생을 비롯한 일부 청년들은 체포를 피해 산속에서 숨어 지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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