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9월15일 5만의 미 해병대가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벌이던 때 낙동강 전선 모든 곳에서 적진을 뚫고 진격하라는 명령이 동시에 내려왔다. 이름도 무시무시한 ‘무제한 공격명령.’ 하지만 진격은커녕 더욱 거세진 인민군의 공격 앞에서 물러나야 하는 형편이었다. 인민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또는 최후의 발악인 듯 보이는 공격을 퍼부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해 봐야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면 전쟁은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수 있었고 실제 인천상륙작전을 벌임에 있어서 미군측이 가장 두려워했던 결과이기도 했다. 9월22일경 인민군의 공격은 갑자기 중단되었다. 후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뒤늦게 이를 눈치 챈 국군은 24일에야 진격을 본격화했다.

전쟁 발발 3일째 되는 새벽 가장 먼저 안전하게 피난길을 떠난 이승만은 피난처에서도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그대로 있으라’며 국민들에게 거짓 방송을 했다. 최고 지도자의 말을 믿은 국민들은 3개월 동안 점령군의 통치 아래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받았다. 수복을 눈앞에 둔 대통령은 이제라도 국민에게 사과하고 용서와 화해의 손길을 내밀 차례였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정반대였다. 국민보도연맹사건에 이어 다시 한 번 그가 과연 정당하게 선출된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는지 의심스러운 대량학살사건이 연이어 벌어졌다.

인민군 점령기 점령행정기구로 인민위원회 등이 선거로 구성되었다. 이때 당선된 군 인민위원이 3878명, 면 인민위원이 2만2314명, 리 인민위원이 7만7716명이었다. 국군 수복 후 이들은 물론 그 가족들, 의용군에서 돌아 온 청년들의 가족들도 부역자에 포함되었다. <경찰10년사> 등 각종 정부자료에 따르면 인민군 점령 불과 3개월 만에 55만 명의 반국가 사범이 새로 생겼다. 잠시 생각해보자. 해방 후 전쟁 직후까지 어림잡아도 국민보도연맹원 등 최소 40여만 명에 이를 좌익활동 의심 인사들이 집단 학살당했다. 전쟁을 빌미로 반정부 인사들을 깨끗이 청소했던 것이다. 그런데 불과 두 달 만에 55만이 새로 생겼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회유하거나 용서하지 않았다. 죽이거나 감옥으로 보냈고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

1950년 10월6일부터 10월25일까지 고양 금정굴에서 200여 명의 주민이 학살당했다. 같은 해 11월8일 검사 장재갑이 학살 현장을 방문해 피해 사실을 확인했지만 2009년 형사사건기록이 공개되기 전까지 국가가 저지른 모든 범죄사실은 은폐되었다. 사건 발생 45년만인 1995년 최소 153구의 유골이 유족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이승만 정부가 말한 55만 명 처리과정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희생자 이봉린(1903년생)은 일제강점기 금융조합 직원이었으며 해방 후 마을 구장 일을 보았다. 1950년 6월28일 인민군이 고양지역을 점령하자 피신했지만 일주일 뒤 농사일이 염려되어 돌아왔다가 농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 때문에 수복 후 부역했다며 고양경찰서로 끌려가 1950년 10월9일 금정굴에서 희생당했다. 1933년생인 아들 이씨는 학살 당일 끌려 나가는 희생자를 보았으며 학살 당일 금정굴 현장을 방문하여 희생자 47명 중 생존자 이경선씨를 굴 밖으로 꺼내는 모습도 목격했다.

▲ 일산금융조합 동료들이라고 한다. 뒷줄 오른쪽이 이봉린 선생이고 앉아 있는 이가 박중원 선생이다. 사진 중 두 분이 금정굴에서 희생되었다.

서오릉 마을에서 태어나다

이봉린은 1905년 서오릉 앞인 고양군 신도면 용두리에서 부친 이윤태와 모친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큰아버지는 서오릉을 관리하는 능참봉의 벼슬에 있었다고 한다. 아들 이씨는 부친이 어려서부터 총명해서인지 학교에 다니지 않았음에도 홀로 한자와 숫자를 익혔다고 했다. 당시 서울과 근접했던 고양군 숭인면 용두리 지역 사회의 분위기로 보아 집안이나 마을의 누군가 가르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없다고 했다.

일산금융조합에서 일하다

이하 기사 전문 보기  http://www.minplus.or.kr/news/articleView.html?idxno=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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