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남원건국준비위원회 건국군 차장이었던 이현열 선생은 미군정의 인민위원회 탄압과 정면 충돌했다. 해방 후 촬영한 사진들에서는 머리를 짧게 깎았던 것으로 보아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사진 이계성 유족 제공]

1945년 8월 식민지 조선에 살던 민중들은 해방을 어떻게 맞이했을까? 해방을 기뻐할 틈도 없이 하루가 지날수록 미군정의 독재가 강화되고 남북 분단이 기정사실로 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시대의 혁명가들은 이를 어떻게 이해했을까?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현열(李鉉烈, 1912년생)은 해방 후 남원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건국군 차장으로 활동하면서 김응조 전북경찰국장을 폭행했다며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석방 후 다시 양남식 살인사건과 관련되었다며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28일 대전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에서 헌병대에 의해 학살당했다.

출생과 성장

이현열은 1912년 남원에서 태어났다. 전주지방법원의 판결문에는 동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에 종사했고, 특기한 경력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아들 이계성(1939년생)씨가 어머니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이현열은 18세 때부터 항일운동에 참여했는데 주로 늦은 밤 전봇대에 벽보를 몰래 붙이는 것이었다고 한다. 1929년 12월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에 전국의 청년학생들이 참여했으므로 아마 이와 관련된 활동이었을 것이다. 이후 활동 대부분은 여운형 선생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없다.

해방과 건국군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산하 귀향 군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군에서 활동했다. 공식 직책은 차장이었지만 부하들은 대장이라고 불렀다. 한편, 판결문은 남원 인민위원회, 농민조합, 노동조합 등의 간부로서 ‘조선의 완전독립은 공산주의 사회화’에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남원 인민위원회는 면사무소나 주재소를 장악하고 미군정에 세금이나 소작료를 내지 말라고 선동했다고 한다. 인민위원회는 해방 후 일제통치기구를 장악하고 스스로 재원을 마련해 운영했던 지역 자치기구였다. 미군정이 이 존재 자체를 부정하니 ‘미군정에 세금을 내지말자고 선동’한 결과가 되었을 것이다. 공산주의 신념에 대해서는 이와 관련된 증언이나 입증자료를 제시하지 않아 당시 조선공산당과 조직적으로 연계시키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들 이계성씨는 어머니로부터 부친이 해방 직후 읍내 청년들과 귀향 군인들을 규합하여 ‘남원 건국군’을 출범시켜 치안활동을 책임졌고, 사매면에 건국군 훈련소를 두었다고 들었다. 해방 직후 밤늦게 돌아온 아버지가 권총을 장독에 숨기는 모습, 앞뒤가 뾰족한 모자를 쓴 미군과 검은 옷을 입은 경찰이 집안을 뒤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건국군의 실체와 성격에 대해 살펴보자. 판결문은 건국군이라는 명칭을 분명히 밝히고 있고, 1946년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발행한 <해방조선>에서도 남원에서 건국군이 습격당했다고 적고 있어 남원지역에 있어서 건국군이라는 명칭이 분명하게 쓰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건국군의 실체를 의심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브루스 커밍스는 미군정과 충돌한 남원의 군사조직을 국군준비대로 보았다. 이는 건국군의 성격을 좌익계로 보았음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 국군준비대에 광복군 등 우익계열의 인사들도 참여했었음을 돌아본다면 이를 좌익계열만의 조직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지역과 해당 지도자의 성격에 따라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건국군이 1945년 12월 김구 선생, 이승만, 이시영 등 귀국한 항일운동가들 앞에서 행진했다는 당시 언론의 보도내용으로 보아도 이것이 좌익계열의 군사조직만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었다.

하여튼 미군정은 1945년 11월13일 법령 28호를 발표해 국군준비대 등 당시 미군정에 등록되었던 30여 개의 사설군사단체들을 불법화하고 조선국방경비대로 단일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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