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만 유족 인터뷰
2016.12.22 17:05
마두리 인민위원장 최의현.
마두리 대동청년단장이었던 그는 1949년 사업상 서울 아현동으로 이사했으나 전쟁이 나자 의정부 실함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피신.
그래도 고향은 괜찮을 것이라 믿었지만 곧 장단 개성 쪽 피난민들이 몰려오니 함께 또 피난. 한강 인도교를 향해서.
하지만 폭파로 피난길이 막혔습니다. 이승만을 비롯해 정부 고위 관료만 도망간 채.
마을로 돌아온 그는 주민들에 의해 인민위원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마을에는 면장, 대한청년단장, 일산역 마르보시 소장 등 쟁쟁한 우익 유명인사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한사코 최의현을 추천했습니다.
방패막이었습니다. 그는 의용군으로 끌려갈 34명, 반동인사 9명에게 기회를 주어 마을에서 아무도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했습니다.
모두 고맙다는 인사를 했지만 그때 뿐, 수복이 되자 '장'자 붙은 인사들이 끌려갈 때 최의현도 고양경찰서로 끌려갔습니다.
부역한 일이 없으니 피신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마두리 치안대장 임대복이 나서 140명의 연판장을 받았지만 금정굴 희생을 막지 못했습니다.
의용경찰대원이었던 같은 마을 강신원은 10월 15일 고양경찰서 유치장에서 금정굴로 끌려나가던 최의현을 목격.
그렇게 하여 죽은 자는 "빨갱이"가 되어 버렸고 덕분에 생명을 건졌다고 말했던 자들은 이제 아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실을 숨기고 비겁하게 한 사람을 빨갱이로 만든 마두리 공동체는 65년이 지난 뒤에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지난 12월 8일 서울고등법원에는 '금정굴 희생자 중에 부역자가 있다'는 증거로 최의현의 조카뻘 최0원(태극단 선양회 사무국장)이 진술서를 제출했습니다.
인민위원장이 희생자 중에 있으니 '금정굴 희생자'는 '부역자, 빨갱이, 김일성의 앞잡이'라고 주장한 김홍두 의원의 발언이 사실임을 뒷받침한다는 것.
패륜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최성만 씨는 이 주장이 "그런 말하면 안 되는 사람" 이라며 "저들만 살겠다고 한강인도교를 끊어 피난길을 막아놓고, 저들만 살아서 돌아와 어쩔 수 없이 적치하에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부역자라며 처벌했다. 제일 먼저 사과부터 한 뒤 법에 따라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고 비판했습니다.
두 시간 가까이 진행된 면담은 내년 발간할 유족회 역사에 수록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