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이 멈추었다. 조사가 부족했던 사건들도 많았지만  법률이 보장했던 2년 연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2년 동안 조사보고서와 한국전쟁사를 정리했고, 2014년과 2015년에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하지 못했던 희생자들의 유족들을 면담했다. 


1장은 이승만 정부의 수립 전후 시기에 발생한 민간인 집단희생 사례를 부여와 태안에서 만났다. 토벌부대가 마을에 왜 진입했는지 영문도 모르고 목숨을 빼앗긴 희생자들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역사적인 맥락만을 살펴보며 짐작하는 데 그칠 뿐이지고 가해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족들과 목격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보았다.

부여와 태안에서 확인된 위 사건들은 산간지역이 아님에도 경찰이 토벌작전식으로 주민들을 공격한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군대에 의한 토벌작전식 주민 공격이 잔혹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반면, 읍내 등 상대적으로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공격이 자행되었다는 것은 잘 알지 못한다. 위 사건들은 이승만 정부가 국민에게 저질렀던 무자비한 체계적 폭력이 이미 일상화되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2장은 대전형무소에서 희생된 부여 구룡면 금사리 고만석, 공주형무소에서 희생된 태안 소원면 송현리 국중구, 김을성에 대해 증언을 정리했다.

최근 소송에서 사법부는 형무소사건 희생자들에 대해 일반 민간인 희생자에 비교해 위자료의 금액을 삭감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는 형평성을 잃은 판단으로 이념적 증오의 산물이다.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은 당시 활동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서 완성될 것이다. 부여 희생자 고만석은 함께 활동한 마을 사람들 중 가장 어려 주로 심부름을 했었다. 태안 국중구와 김을성의 경우도 어떤 심각한 반사회적 행동을 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극심한 가혹행위 아래에서 만들어진 관제 빨갱이였을 것이다.


3장은 진실화해위원회 이후 확인된 국민보도연맹사건을 다루었다. 충북지역 충주 살미면, 보은, 옥천, 충남지역 대전, 부여, 서산, 경북 상주, 경남 합천에서 발생한 사건을 확인했고, 이 중 충주 살미면, 보은, 부여에서는 한 마을의 주민들이 대규모로 피해를 입은 사실을 확인했다.

국군과 미군은 대략 경부고속도로의 동쪽에서 지연전투를 벌이며 후퇴했으며, 서쪽에는 소수의 경찰이나 해병대가 별 전투없이 낙동강전선으로 후퇴했다. 이는 1950년 7월 한달 동안 진행되었던 지연전투와 후퇴전략의 큰 흐름이다. 그런데 이 전략과 전투는 전쟁에서 수행된 것이라고 하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측면이 너무 많았다. 대규모 전투의 횟수도 실제 몇 회 안 되어 보이는 반면 후퇴하는 국군과 경찰이 저지른 국민보도연맹사건은 엄청났다. 희생자 수나 발생 빈도는 전투의 수십 배를 넘어 보인다. 결국 이승만 정부는 두개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강력하게 무장한 적군을 상대로, 싸우는 ‘척’만하는 후퇴 전쟁이었고, 다른 하나는 남겨두면 침략군을 편들 것 같은 비무장의 나약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전쟁이었다.


4장은 국군 수복 직전 고양, 영암, 순천에서 발생한 민간인희생사건을 다루었다. 인민군 점령시기 피해는 수복 직후부터 미군 측에 의해 광범위하게 조사되었으며, 부역관련 재판 과정에서도 검찰에 의해 조사되었다. 여기서 확인되지 않은 피해는 이후에도 지난 독재정권들에 의해 충분히 발굴되어 반공정책의 정치적 수단으로 쓰였다. 게다가 2005년 이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2010년까지 다시 보완 조사되었다. 무려 60년을 넘게 조사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경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사건들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이념적 잣대가 한낫 자기 이해관계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5장은 국군 수복 후 서울, 고양, 김포, 홍천, 부여, 태안, 영광에서 발생한 민간인희생사건을 다루었다. 6월 25일 전쟁발발일 이승만 정부는 가장 먼저 부역자처벌의 법적 근거를 만들었다. 제1호 대통령령인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 그것이다. 침략자들이 강했든 아니면 유인전략에 말려들었든 낙동강 전선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은 3개월동안 점령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제 인민군 점령지의 국민들은 모두 부역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수복한 이승만 정부는 처벌대상이 무려 55만명이었다고 밝혔다. 보도연맹원 34만 명이 대부분 제거된 뒤 불과 2개월 채 지나지 않아 생긴 반국가 사범이라고 하기엔 지나치다. 여기에 미군폭격과 토벌작전, 증거없는 1심재판, 형무소재소자 등 희생자들을 합쳐보면 적어도 100만 명에 이르는 청장년이 죽거나 범죄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6장은 1·4후퇴 시기 여주와 충주에서 발생한 사건을 검토했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 새롭게 확인한 첫번째 유형의 사례는 여주 왕대리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국방부에 의해 2011년 33구의 민간인 유골이 발굴되었다. 두번째의 사례는 충주 살미면 토벌작전에 의한 피해로 보이는 것이었다. 가해자가 국군 8사단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학살 피해 사실이 소외받는 상황이지만 이 시기 사건들은 더욱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일가족이 희생되어 증언자도 없고 또한 주변 주민들조차 증언을 꺼리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짐승의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참혹했던 사건일수록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길에서는 가장 먼 곳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7장은 용인과 천안에서 발생한 미군 폭격 사건을 다루었다. 9월 중순 수복 직전 미 공군은 수복작전을 지원하면서 민간인과 인민군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는데 천안의 피해는 이 시기 발생한 것이었다. 한반도 이남지역에서 미군 폭격 피해가 집중되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951년 1~2월이었다. 중국지원군의 참전으로 수세 국면에 놓인 미군이 우세한 공군력을 사용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막고자 했던 시점이었다. 이는 용인의 피해에서 살펴 보았다.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폭격에 의한 민간인피해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결과론적 해석일 수 있겠지만 폭격행위 자체는 적진영의 민간인을 잠재적인 적군으로 본 것으로 적 진영 전체에 대한 증오의 산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 같다.


글쓴이와 인터뷰한 대부분의 유족들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했다.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신경을 못 쓴 경우도 있다. 국민들은 국가 폭력과의 싸움을 앞 두고 이를 두려워 한다. 목숨을 내 놓더라도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권리 위에 잠자는 자”라고 비웃을 수 있을까? 아직도 공포심에 좌절하거나 무력감에 포기하는 말 못하는 유족들이 많다는 사실은 그 만큼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15년 11월 경찰의 불법 차단막 앞에서 항의하던 백남기 노인이 물대포에 쓰러졌다. 사경을 헤맨지 두달이 넘어 간다. 아직도 경찰수뇌부는 물론 청와대조차 사과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그들에겐 아직도 국민이 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청산의 대상이 될 사건이 다시 속출하는 시대이다. 그 원인을 찾고자 하는 노력조차 낡아 보인다.


목차


머리글 멈춘 기억과 멈추지 않는 아픔  5


1장 국가범죄의 시작  11

자식도 몰랐던 억울한 죽음 _부여 장암면 13

고문사 당하거나 재소자 되거나 _태안 소원면 17

전쟁 전 경찰의 주민 공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_소결 19


2장 전쟁의 시작과 양심수 살해  21

전쟁만 안 났으면 집에 왔어 _대전형무소 22

밥 먹인 죄 밖에 없었거든 _공주형무소 27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길래? _소결 31


3장 국민보도연맹원, 자식에게 해 될까 봐 저승길 트럭에 오르다  33

마을 남자들은 다 끌어가 싸리재에서 _충주 살미면 34

미륵뱅이 길게 판 구덩이에서 줄지어 세워 놓고 _보은 66

총살 후 기름으로 불을 질러 _옥천 110

헌병들이 군화발로 밟고 다녀 _대전 골령골 116

강변 마을마다 학살당한 시신이 떠밀려 와 _부여 137

똑똑하면 뭐 해요, 죽을 일 하고 다니는데 _서산 운산면 159

함창면 창고가 콩나물시루처럼 끌려온 사람들로 빡빡 해 _상주 170

여기서 조사를 멈춘다면 형평에 어긋나 _합천 180

두개의 전쟁 _소결 187


4장 수복 직전 피해와 알고 싶지 않은 진실  189

개구리가 경첩에 나왔다가 _고양 191

인민군이 와도 보초 서고 수복 후에도 보초 서고 _영암 243

여순사건 후 군복 입은 빨치산에게 끌려가 _순천 250

9월 28일 수복과 무정부 상태 _소결 253


5장 도망갈 땐 언제고 이제 와 부역자라고  255

수복 후에도 서북청년단이 _서울 효자동 257

‘금방 오시겠지’ 그러고 기다렸어 _고양 263

그 사람들 다 죽이러 가는 거래 _김포 양촌면 368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떻게 알고 도장을 _광주 오포면 375

이북이 오면 이북편, 이남이 오면 이남편 _홍천 희망리 381

후퇴하면서 죽이고 수복하면서도 다 잡아 죽이고 _부여 388

옹동벛 고랑에가 하얗게 드러누웠어 _태안 410

자수하러 오는 사람을 끌어 갔어 _영광 군서면 420

사과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_소결 435


6장 1·4후퇴와 다시 시작된 공격  437

그냥 총을 쏘면 “펑펑”, 사람이 맞으면 “팍팍” _여주 왕대리 439

시어머니가 놀래가지고 맨날 손을 떨고 _충주 살미면 444

소외된 희생 _소결 449


7장 미군 폭격과 하얀 옷 증오  451

폭격이 무서워 다리 밑으로 들어갔다가 _용인 양지면 452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별할 수 있는 대낮에 _천안 성남면  455

폭격 피해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다 _소결 460


맺음글 청산할 과거사가 줄어들지 않는 사회  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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