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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희생자 심기만, 심우현, 심준섭은 송포면 법곶1리 동촌마을에 살면서 농사를 지었다.

(법곶2리는 이산포, 법곶3리는 서촌마을) 희생자들은 1949년경 비료를 준다고 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민군이 점령하자 희생자 심기만은 동네에서 반장 일을 보면서 주민들을 동원하는 일을 하였다. 당시 송포면 인민위원장은 박기섭이었으며 월북했다고 알려져 있다.


9·28 수복이 되자 도촌마을 주민 일부가 마을에서 큰 집을 장악하고 주민들을 연행해 가는 등 치안활동을 하였다. 도촌치안대로 알려진 이들이 동촌마을에 와서 심기만, 심우현, 심준섭 세 사람을 한꺼번에 도촌치안대 사무실로 끌고 갔다. 오후 2~3시경 총을 메고 사복차림에 빨간 완장을 찬 도촌치안대 사람들 네 사람이 와서 희생자 심기만을 불러내자 희생자는 “죄가 없으니 별 일이 없을 것”이라며 따라 나섰다. 희생자들은 1차로 도촌치안대 사무실로 끌려 갔으며, 그 후 지서를 거쳐 고양경찰서로 이송되었다.


희생자가 고양경찰서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은 고양경찰서에서 일하고 있는 같은 마을 주민이 알려주어 밥을 나르게 되었다. 희생자의 동생 심기호는 고양경찰서로 밥을 날랐는데 일주일이 되었을 때, 고양경찰서에서 일한다는 마을 주민이 “이제 경찰서에 없으니 밥을 그만 가져와라”고 하여 더 이상 밥을 나르지 않았다.


가족들은 당시 다른 곳으로 넘겼다고 하므로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이후 행방불명된 것으로만 알고 있었으나 1995년 유골이 발굴되고 나서야 금정굴에서의 희생을 확신할 수 있었다.


법곶리에서는 모두 여덟 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