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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희생자 이봉린(중면 일산리)

2013.10.24 15:14

관리자 조회 수: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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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이봉린(유족 이병순 제공)

 

희생자 이봉린은 해방직전부터 마을 2구장이었다. 일산리는 2개의 구가 있었으며 1구장은 이범진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 말기에 일본 군인들의 부식으로 쓰기 위해 일산역에 있던 30여 마리의 소가 일제 패망에 따라 방치되게 된 일이 있었다. 이때 당시 열차운송회사 ‘마르보시’의 일산소장이었던 최경춘이 이를 착복하려고 하자 희생자가 이를 막고 일반 주민들에게 분양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최경춘이 이봉린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최경춘은 9․28 수복 후 치안대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인민군이 고양시를 점령하자 희생자는 구장경력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전쟁 전부터 마을 반장으로 잘 알고 지내던 김규남의 권유에 따라 농촌위원장으로 곡식 이삭의 수를 세는 등 공출양을 계산하는 부역을 하게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후 9월 28일 경 희생자 등 마을 주민들 여러 사람이 유엔군을 환영하기 위해 철길을 따라 능곡으로 갔는데, 환영 장소에서 희생자를 알아 본 치안대에 의해 능곡지서로 연행 당하게 되었다. 당시 이봉린 외에도 여러 주민들이 능곡지서로 연행되었다고 하는데, 감금된 장소는 능곡 역 앞 곡식창고였다. 이틀 후 뒤 늦게 이 소식을 들은 희생자의 처 이계선이 능곡지서의 유치 창고로 사흘간 도시락을 날랐다.


10월 5일경 희생자는 고양경찰서로 이송되어 임시유치시설인 양곡창고에 감금되었다. 희생자의 가족들은 희생자가 금정굴로 끌려가기 전까지 도시락을 고양경찰서 양곡창고로 날랐다. 그러던 중 10월 9일 아침, 밥을 가지고 갔던 이계선은 고양경찰서로부터 “문산으로 좌익 심사를 받으러 가니 오늘은 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 뒤 희생자가 10여 명의 경찰과 치안대, 태극단에게 끌려가던 행렬이 목격되었다. 희생자는 행렬의 맨 뒤에 있었다. 당시 연행하던 경찰은 유엔군복을 입고 있었으며, 치안대원들은 완장을 차고 있었다. 끌려가던 길 옆에 희생자의 집이 있었으므로 가족들이 모두 희생자가 끌려가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모두 문산으로 심사를 받으러 가는 줄만 알고 있었다.


점심 즈음, 가족들은 총소리를 듣긴 했으나 처형하는 소리로 생각하지 못했다. 잠시 후 희생자와 함께 끌려간 김석권의 부친 김상용이 이봉린의 집에 들려 “이봉린 형님이 돌아오셨냐?”고 물었고, 이삼린이 “문산으로 심사받으러 갔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김상용은 “심사는 무슨 심사입니까? 모두 금정굴에서 쏴 죽였어요”라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희생자의 시신이나마 수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희생자의 동생 이삼린과 반장 김성남, 김상용 등 7명이 밧줄과 사다리, 마차를 가지고 금정굴로 갔다.


금정굴에 도착한 일행은 “사람 살려!”라는 소리를 듣고 밧줄을 이용해서 이삼린과 동네반장 김성남이 굴 안으로 내려갔다. 굴 안은 어둡고 피비린내와 악취가 진동하였다. “사람 살려”라는 소리를 지른 사람은 이경선이었다.

 

이경선을 꺼내 살려 준 일행은 피비린내 나고, 생명이 덜 끊어져 살려달라고 악을 쓰는 사람, 팔이 떨어진 사람들로 가득 찬 굴속에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신을 들어서 옮길 수 있는 공간도 전혀 없어 결국 어쩔 도리 없이 도로 올라오게 되었다.

 

일행들은 경찰과 치안대가 쫓아 올 것으로 생각하고 오던 길과 달리 지금의 일신자동차학원 개울둑으로 내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처음 일행들이 올라간 길로 치안대원들이 자전거를 타고 쫓아왔다. 오후 3시경 형사부장과 치안대가 위 이삼린집으로 들이닥쳤으며 겨울에 땔감으로 마련한 나무둥치 속을 대검으로 쑤시면서 “시체를 내 놓으라!”고 하면서 온 집안 살림을 뒤집어 놓았다.

 

형사부장은 이삼린에게 권총을 겨누기도 했고 분을 못 참겠다는 듯 바닥 방향으로 공포를 2~3발 쏘았다. 형사부장, 치안대들이 철수한 후 조금 있다가 치안대들이 집에 있던 닭 일곱 마리를 빼앗아가고 밭의 배추를 모두 뽑아가자 옆집에 살던 박민연 순경이 야단을 쳐 만행을 그쳤다. 당시 옆집에 대한청년단 고양군단장 이학동과 박민연 형사가 살고 있었다.

 

같은 날 희생자 서상용 등이 고양경찰서 유치장에서 끌려나오는 장면을 목격한 서병규는 그 맨 뒤에 있던 희생자 이봉린을 목격하였다. 일산리에서 희생자와 함께 끌려갔던 최기준은 대한청년단 이학동과 동서지간이어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