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 이기철(중면 일산리)
2013.10.24 15:11
희생자 이기철의 본적지는 장항리였다. 거주지는 일산리 고양경찰서 앞이었고, ‘무시로’라고 하는 고공품 사업을 하고 있었다.
전쟁 전, 희생자는 호국군에 입대하여 온양에서 훈련을 받고 소위계급장을 달고 돌아 왔으며 그 후 집을 호국군 사무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일산의 호국군은 수십 명이었으며 일산초등학교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다.
전쟁이 나자 호국군들은 집에 있던 서류를 그대로 둔 채로 모두 도망하였고 피난을 못 간 희생자의 가족들이 이 서류들을 집 뒤에 파묻기도 하였다.
인민군이 진주하자 인민위원회가 생겼으며 폭격이 심해지자 희생자의 가족들은 방공호를 파고 숨어 지냈다. 얼마 후 희생자의 경력에 대해 알고 지내던 좌익인사 장항리의 김동표가 희생자에게 인민위원회 일을 할 것을 강요하였고 희생자가 이를 거절하자 매를 맞고 서울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일도 있었다. 그 후로 어쩔 수 없이 며칠 동안 인민위원회 일을 보게 되었다.
국군이 수복할 무렵 희생자는 국군을 환영하기 위해 집을 나갔는데 그 후로 소식이 없었으며 얼마 지나 당시 중면 부면장으로 있던 동생 이기현이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희생자가 고양경찰서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그 행방을 알게 되었다. 희생자는 양복점을 했던 대한청년단 이병학과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희생자의 처 홍유임이 열흘이 안 되게 음식을 날랐는데 그러던 10월 25일 위 이기현이 면사무실로 출근하던 중 후동(지금의 일산3동 후곡마을 아파트단지)부근에 도착하였을 때 요란한 총소리를 들었으며 예감이 이상하여 고양경찰서에 확인하였더니 이미 희생자가 사라진 뒤였다고 한다.
의용경찰대원 강흥환은 이기철이 희생당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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