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피학살양민유족회’구성 함겨운 결실 … 정부 나설 차례(한겨레 1995. 10. 1)
2013.08.10 13:46
‘금정굴 양민학살’ 유골 발굴 의미
이념대립 상처 진상규명 첫발
93년 ‘피학살양민유족회’구성 함겨운 결실 … 정부 나설 차례
강남규 기자
경기도 고양시 탄현동 금정굴에서 29일 한국전쟁 당시 숨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유골이 발굴됨으로써,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금정굴 양민학살’사건의 실체가 비로소 확인됐다.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까지 극심했던 이념대립의 와중에서 전국 곳곳에서 숱한 양민학살사건이 있었지만, 이후 첨예한 남북대치 상황 속에서 이에 대한 진상규명은 아예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금정굴 사건도 그 한 예이다. ‘금정굴사건 진상규명위’ 위원장 김양원(43)씨는 “유족들 중에서도 자칫 또 빨갱이로 몰리는게 아니냐며 사건 자체를 공개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29일 처음 발굴된 유골과 유품 70여점은 상할대로 상해 조각만 남은 두개골과 푸른 녹이 슨 탄미, 학살 당시 손과 발을 묶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전선, 희생자들의 신발 등이다.
유골 발굴은 지난 93년부터 3년여 동안 진실을 밝히려 애쓴 ‘금정굴사건 진상규명위원회’와 유족회의 힘겨운 노력의 결과이다.
유족들은 지난 93년 9월 30여명이 모여 ‘고양 일산 금정굴 피학살양민 유족회’(대표 서병규, 67)를 구성했다. 이어 유가족 1백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43년만에 첫 위령제를 금정굴에서 지냈다.
이후 유족회를 중심으로 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진상규명 노력은 체계를 갖추게 됐다. 93년 10월 진상규명위는 고양경찰서에 당시 사건에 대한 수사를 호소하는 진정서를 시작으로 국회 내무위와 청화대 등에 무수히 진정서와 탄원서를 냈다. 그러나 이들 기관들로부터 돌아오는 회신은 “근거 없음”이었다고 한다.
금정굴사건이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배경 중 하나는 이 사건이 민간인들간의 이념 대립 와중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점이다.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 가족이 모두 고양 일대에 지금도 생존해 있는 것이다. 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북한군이 내려오면서 일부 좌익세력이 우익단체 단원 50여명을 처형했고 그 반작용으로 북한군 퇴각 뒤 우익단체 단원들이 부역자를 색출한다며 주민들을 대량 살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족들은 “당시 사망자가 1천여명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우익단체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금정굴에서 1백여명의 좌익인사를 처형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고 말했다.
진상규명위는 이제 사건의 실체가 확인된 만큼 정부가 나서 발굴작업과 진상규명을 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잘잘못을 가린다는 차원이 아니라 당시의 역사를 복원하고 아픔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선 이제 사건을 덮기보다 드러내야 한다는 게 유족들의 주장이다. (1995. 10. 1.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