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실태조사 시작
2014.03.18 12:01
(부친 김형렬 님의 희생경위에 대해 증언하시는 김기성님)
3월 17일(월) 김기성 금정굴사건 희생자유족을 시작으로 "2014 고양지역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실태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김기성님께서 증언하시는 이 자리에는 마임순고문님, 이경숙회장님, 신기철 연구소장 외에 남동진 고양신문기자, 박경만 한겨레신문 기자께서도 참석하여 취재했습니다.
목격 증언을 토대로 당시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7식구의 가장이신 김형렬께서는 덕이동 할미마을에 살았으며, 1950년 당시 35세이셨습니다 .
전쟁은 천둥소리 같은 포성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식솔을 이끌고 피난한다고 했으나 이웃마을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인민군들이 지나가고 학교에서 강연회가 열려 주민들이 동원되었습니다.
2개월 지난 뒤 수복이 되었고 희생자는 수복하던 아군을 환영하기 위해 일산역으로 가던 중 고양경찰서로 연행당하셨습니다.
할미마을을 떠나 일산으로 향하던 주민 10여 명을 볼 수 있었고 이 중 3명이 연행당했던 것이었습니다.
희생자는 김형렬, 김재환, 김영환.
가족들은 고양경찰서로 밥을 날랐습니다.
이틀 뒤 경비를 서던 경찰관은 밥을 그만 가져오라고 했고...
음력 8월 25일(양력 10월 6일) 탄현 한춘호 한의원 앞에서 처가 식구들이 금정굴로 끌려가는 김형렬을 목격했습니다.
희생자가 입은 삼베옷은 피범벅이었습니다.
잠시 뒤 학살의 총성이 요란하게 퍼졌습니다.
피해는 학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치안대는 숫가락 6개와 밥그릇 6개를 제외하고 모든 살림살이를 가져가 버렸습니다.
이들은 폭격을 피하기 위해 파놓은 방공호에 겁 주려는 듯 총질을 하고 떠났습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남은 가족들 역시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고 결국 서울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1995년 유골발굴 당시 활동했던 김기성님은 "이제 증언하게 된 것은 어려서부터 겪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히면서 "늦었지만 이제라도 부친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는 길에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