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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울진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1:14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037

전쟁 전 국군 3사단 22연대는 대구에, 23연대는 부산에 주둔하고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 22연대가 수도경비사령부에 배속되어 서울로 출동했으며, 23연대(연대장 김종원)는 6월 28일 부산을 출발하여 대구를 경유 29일 포항에 집결했다. 30일 250여 명의 인민군에 의해 울진이 점령당하자 국군은 7월 1일 울진 탈환 전투를 벌였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울진에서는 전쟁 발발 후 연행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울진경찰서와 국군 3사단 23연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7월 5일 매화지서 경찰과 국군은 원남면 주민 5~6명을 매화 전시골에서 총살했으며, 같은 날 오산지서와 기성지서 경찰은 원남면과 기성면의 주민 24명을 연행했는데 이들은 국군 3사단 23연대 군인에 의해 후포 박골에서 총살당했다. 같은 날 원남면 일부과 울진면 주민 8명은 묵호육전대 소속 해병대에 의해 죽변 후릿개에서 총살되었다.

 

<미 함포 포격 피해>

 

인민군이 울진지역을 점령한 6월 28일 직후인 1950년 7월 초 미 순양함 주노우(Juneau)함, 블랙스완(Black Swan)함, 자마이카(Jamaica)함 등에서 쏜 함포 포격으로 인해 울진읍 연지리 주민들이 사상당했다. 당시 함정들은 6월 26일부터 7월 5일까지 묵호, 강릉 등의 해안에 포격을 가했다.

인민군 후퇴기인 9월 미 함포에 의한 피해가 있었다. 9월 25일 울진읍 읍내리 주민들이 미 함정의 함포사격으로 인해 사상당했다. 당시 울진 근해에서 활동하던 순양함은 USS헬레나와 USS드헤이븐 등이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이 울진을 점령하자 울진군수 등 피난하지 못한 울진군수 등 50여 명의 우익인사들은 내무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 중 1명이 수복작전을 벌이던 국군에 의해 사망했으며 나머지는 국군 수복 후에 모두 석방되었다.

 

<부역혐의 피해>

 

울진경찰서의 『경찰서연혁』에 따르면, 인민군은 7월 11일경부터 울진에서 점령정책을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인민군은 7월 하순경부터 인민위원회 및 각종 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우익인사 탄압, 의용군 모집 및 징용, 인민군 탄약운반 및 도로보수 등의 부역활동 등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마을에 따라 사정이 조금씩 다르지만 리 단위 인민위원장은 반드시 좌익계 사상이나 이념을 가진 인물만이 선출된 것이 아니고 구학문 등계 사상이학식이 있고 마을 주민들에게 신망을 얻고 있던 사람이 선출되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는 대한청년단장이었던 사람이 인민위원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인민위원장 이외 각종 위원회 및 부서원들은 지목을 당해 어쩔 수라 이 명단에 기재되거나 자기도 모르게 명단에 올라 수복 이후에 부역혐의자로 연행되어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울진경찰서에서 작성한 『부역자 명부』를 보면 인민군 점령시기에 울진군에 부역행위를 한 사람의 수는 총 4,569명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자의건 타의건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인민군에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추측할 수 있다.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 상당수는 수복하던 국군과 경찰 등에 의해 학살당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국군 3사단이 울진읍내에 진입한 때는 9월 27일이었는데 이날 낮에 있었던 F-51 전투기의 네이팜 폭격으로 시가지 일부가 불에 타고 있었고, 인민군 주력부대는 이미 후퇴한 뒤였다고 한다.(전쟁사 4, 61쪽)

1950년 9월 26일 추석날 국군 3사단 22연대 군인이 노음3리 마을에 공포탄을 쏘면서 들어와 방공호로 피신하였던 주민들을 살해했다. 정오경 노음1리로 들어온 22연대 헌병대는 추석 제사 후 술에 취해 있던 최종구를 우물가로 끌고 가 사살했다. 같은 날 수산리와 산포리에 들어 온 국군 22연대 군인과 CIC 대원들은 수산리 김동옥과 산포리 박원출을 사살했다.

한편, 9월 27일부터 28일 사이에 평해로 상륙하여 수복작전을 하던 국군 3사단 23연대 소속 군인들은 기성면 사동3리에 진입하여 주민들을 마을 앞 백사장에 소집한 뒤, 손을 들고 무릎을 꿇게 하였다. 이때 집 앞 방공호에 있다가 늦게 나온 15살 소년을 소집에 늦었다는 이유로 사살했다.

1950년 10월 7일부터 군내 치안활동을 전개했던 울진경찰서는 각 지서별로 대한청년단과 이장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명단에 근거해 주민들을 체포, 검거하였다. 연행된 주민들을 지서, 면사무소 창고, 국민학교 건물 등에 갇혔다. 이들은 사찰계형사들로부터 부역활동 가담 여부에 대한 조사를 받고 A, B, C 등급으로 분류되었다. A, B 등급으로 분류된 이들은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었는데, 이때 이송된 사람은 울진군 기성면 기성지서에서 40여 명, 근남면 근남지서에서 25명, 죽변지서에서 15명 정도였다. 나머지 C급 부역혐의자들은 3~7일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이들 중에는 구타 등의 가혹행위를 당해 귀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면소재지 각 지서에서 울진경찰서로 이송된 주민들은 울진읍내 울진국민학교, 남소학교, 울진경찰서 유치장 등에 각각 분리 수감되었다. 울진경찰로 이송되어 재조사를 받고 유치장에 구금된 부역혐의자들은 2~3일간 구금이 된 후 신림 올시골로 끌려가 집단 살해당했다.

신림 올시골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장소에서 학살이 진행되었다. 당시 주민들이 살해된 것으로 확인된 사건현장은 게골 세 곳과 신림 작은판데기, 신림 큰판데기 등 모두 5곳이다. 당시 게골에는 40여 개의 구덩이가 있었다. 당시 게골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시신들이 널려 있어 밟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어떤 구덩이에는 여자들의 시신만 있었다. 여자들이 죽은 구덩이는 대개 산등성이 위쪽에 있었고, 남자들이 죽은 구덩이는 산등성이 아래쪽 골에 있었다. 이는 학살이 계획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신림 올시골에서 살해된 주민들의 수는 울진경찰서 『경찰서 연혁』(1956)에 “수복 후 시국을 불인식한 자 259명을 송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사건으로 250여 명이 희생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울진의 주민들은 헌병대 등 국군에 의해서도 희생되었다. 10월 20일, 울진면(현재 죽변면) 후정1리 부둘골에서 헌병대, CIC와 경찰에 의해 40여 명이 총살되거나 생매장되었다. 10월 8일부터 19일까지 헌병대와 CIC 군인들은 우익단체와 이장들이 제공한 명단을 근거로 주민들을 직접 연행하였다. 이들은 주민들을 죽변지서, 죽변국민학교, 후정리 민가로 연행하였는데 도중에 사살하기도 하였다. 죽변에 주둔한 군인들은 연행한 100여 명의 주민들을 분류한 후 일부는 석방했으나 처형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또다시 군인에게 인계되었다. 헌병대와 CIC는 울진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어 있던 주민들을 경찰로부터 인계받았다. 1950년 10월 20일 저녁 무렵, 무장한 보충대 군인들에게 인계된 주민들은 트럭에 실려 후정리 부둘골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죽변에 주둔했던 군인들이 철수하고 난 후 후정리 부둘골 향나무 아래 구덩이에서 30여 명의 희생자들이 사살당한 채 묻혀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10월 중순부터 온정지서 경찰은 40여 명의 주민들을 연행하여 온정면사무소에 구금하였다. 주민들은 이후 한 달간 온정면사무소 창고에 구금되어 있었는데, 이중 황진원 등 12명은 11월 26일 온정지서 경찰에 의해 밧줄에 묶여 울진군 기성면 황보리 문둥이골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11월 말경, 하당지서 경찰은 남왈수를 포함하여 5~6명의 주민을 끌고 가 사계리 나그네골에서 총살했다.

기성지서 유치장에 구금된 주민들 중 일부는 울진경찰서로 이송되었으며 나머지 안병위, 안두원 등은 11월 말 트럭에 실려 가 후포항에서 배에 실려 수장되었다.

울진에서 국군 수복과 함께 희생된 주민들은 300여 명으로 보이는데 조사되지 않은 지역이 많이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희생규모는 더 늘어날 것이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5.

매화리 전시골 등

40

3사단 등

폭격

1950. 6.~9.

울진읍

미 순양함

포격

부역

1950. 9. 26.~28.

울진읍

3사단

부역

1950. 10. 7.

신림리 올시골

250

울진경찰서

부역

1950. 10. 20.

후정리 부둘골

40

헌병대

부역

1950. 11. 26.

기성면 황보리 등

20

각 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