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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영주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1:06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000

<전쟁 전 피해>

 

영주지역에서는 전쟁 전 토벌작전을 벌이던 국군 또는 경찰에 의해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1948년 5월 14일 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주민들이 트럭에 실려 봉화 문수산에서 총살당했다. 1949년 8월 11일에는 영주 단산면 옥대리에 살던 면 대동청년단 감찰부장 남성열, 대동청년단장 신원조 등 10여 명의 주민들이 읍내리 순흥국민학교에 주둔하던 태백산 전투사령부 군인들에게 끌려가 순흥면 입암리 비봉계곡에서 총살당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영주지역에서도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했다. 전쟁 발발 후 영주경찰서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은 7월 중순 영주읍 상망리 등에서 희생되었다. 부석면 임곡리 주민들은 트럭에 실려 봉화방면 영주 삼재골짜기에서 희생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김만식 상사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사건의 가해자는 6사단 헌병대였다고 하는데, 『한국전쟁사』에는 7월 18일부터 23일까지 국군 8사단이 주둔한 사실이 확인된다. 7월 21일 소강상태의 전투가 있었으나 22일 인민군 측의 일제 공격을 받고 23일 영주 시내에서 철수했으며, 7월 29일 주둔하던 영주 평은면 금광리 부근이 공격을 받자 안동으로 후퇴하여 8월 1일가지 주둔하였다. 7월 30일 새벽 인민군의 전면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7월 31일 미 제8군으로부터 낙동강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져 8월 1일 철수를 시작했다.

 

<부역혐이 피해>

 

영주지역의 수복은 경찰과 국군에 의해 이루어졌다.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영주경찰서는 1950년 9월 22일부터 10월 22일까지 123명을 사살하고 33명을 생포했다.(735쪽) 한편, 국군 8사단 10연대와 16연대는 9월 28일 영주 풍기읍에 진입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의해 확인된 사건은 1951년에 발생한 것이다. 영주군 부석면 남대리 마을반장 도인수가 부석면 북지리 이분출 집 사랑방에서 피난 생활 중 1951년 2월 20일 경찰에게 끌려간 뒤 낙화암 바위 밑에서 희생되었다. 도인수의 시신은 부석에서 영주 가는 길 3km지점인 낙화암 바위밑에서 그의 부친과 동네사람이 수습하여 근처에 매장했다. 영주경찰서 근무자 손씨(손부철)에 따르면, 1개면에 많게는 50여 명의 주민들이 부역혐의로 총살당했다고 한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8. 5. 14.

봉화 문수산

전쟁 전

1949. 8. 11.

순흥면 입암리

10

태백산 전투사령부

보도연맹

1950. 7.

영주읍 상망리 등

6사단

부역

1950. 9.~10.

123

영주경찰서

부역

1951. 2.

낙화암 바위

1

영주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