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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영양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1:04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564

<전쟁 전 피해>

 

영양에서는 전쟁 전 3사단 22연대 군인들이 영양읍 장날에 주민들을 시장 옆 공터에서 총살시키는 것이 목격되었다. 청통면 방위대원 강씨(강용수)에 의하면 1949년 10월 31일 영양 입암면 삼산리 주민 10명이 경찰에 의해 영양읍의 속칭 팔십골 골짜기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1월 6일에는 영양 청기면 토곡리 주민 10여 명이 청기면 토구동에 주둔하던 국군에게 끌려가 희생되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나자 일월면, 청기면, 영양읍 주민들이 영양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당시 주민들은 지서 혹은 지서 인근 창고에 1주일에서 10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영양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주민들 일부는 트럭에 실려 안동시 남후면 수상리 ‘청골’ 혹은 ‘도둑골’에서 희생되었다. 영양읍 ‘팔수골’도 주민들이 희생당한 지역으로 알려졌다. 한편, 입암면에 거주하였던 사람들은 7월 22일 입암면 삼산리에 소재하는 야산에서 희생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영양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가 최소 89명이라고 밝혔다.

 

<부역혐의 피해>

 

영양지역의 수복은 9월 26일에 이루어졌다. 당시 수도사단 18연대와 1기갑연대, 1연대가 영양을 수복하였다. 『한국전쟁사 4』에 의하면, 수복 후 1연대가 수도사단의 예비부대로서 잔적을 소탕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하는데,(88쪽) 9월 27일 이들에 의해 오태원 등 영양읍 대천동 주민 18명이 마을 하천가에서 총살당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영양경찰서의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처형자명부」는 당시 희생자들은 11명이었는데, 모두 ‘6․25 미후퇴자로서 1950년 9월 26일 아군 선발대에 의하여 처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양지역의 민간인 피해는 1951년에도 이어졌다. 1951년 3월 29일 영양경찰서 경찰은 일월면 주곡리 주민 조동수를 부역혐의로 연행하여 마을 앞산의 속칭 어금골 골짜기에서 총살하였다. 조동수는 한국전쟁 이전에 청기면 청남국민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다가 인민군 점령기에 장학사 직책을 맡았고, 그 일로 인해 1951년 초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 부역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바 있다고 한다. 조동수는 법원의 판결 이후 자택에 돌아와 있었는데, 1951년 3월 29일 새벽 영양경찰서에 연행되었다. 그 후 소식이 끊겨 행방을 알지 못했는데, 얼마 후 마을 앞산 속칭 어금골 골짜기에 나물을 캐러갔던 주민들이 시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조동수의 사망에 관하여 영양경찰서의 「대공인적위해자조사표․처형자명부」에는 ‘전쟁 이전 남로당에 가입하여 좌익 활동을 했고, 전쟁당시에 처형된 자’로 기록되어 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9. 10. 31.

팔십골 골짜기

10

영주경찰서

전쟁 전

1950. 1. 6.

청기면 토곡리

10

3사단

보도연맹

1950. 7. 22.경

입암면 삼산리 등

89

최소

부역

1950. 9. 27.

영양읍 대천리

18

수도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