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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영덕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1:02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681

<전쟁 전 피해>

 

영덕에서는 대구 10월 민중봉기에 호응하여 10월 4일을 기일로 하여 각 면에서 시위가 계획되었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연기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연락받지 못한 달산면에서는 가을 운동회가 열리는 달산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시위를 일으켰다. 이를 진압하려는 경찰의 공격으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당했다.

 

1947년 3월 6일에는 영덕군 축산면 대곡리 오중학 등 주민 4명이 축산지서 경찰관에게 연행되어 축산면 대곡리 초막골에서 총살당했다. 같은 해 7월 15일에는 남정면 주민 400여 명이 남정지서 경찰과 대치하던 중 4명이 사살당했다.

 

1948년 8월 30일에는 토벌국군에 의해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경찰의 소개지시를 듣지 못했던 영덕 축산면 주민들이 마을 안 ‘약물래기’ 근처의 빈집에 있다가 6연대(당시 경북에 주둔했으며, 1948년 11월부터 1949년 3월까지 있었던 대구6연대사건 후 3사단 22연대로 흡수 됨) 군인들에게 사살되었다.

 

1949년 4월 12일에는 영덕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주민 30여 명이 영덕읍 남산리 방천둑에서 국군에게 총살당했다. 4월 18일에는 영덕 축산지서로 연행된 주민들이 축산면사무소 뒷산 계곡에서 총살당했으며, 11월 5일에는 영해지서로 연행된 영해군 묘곡리 반장 주후원 등 10여 명의 주민들이 영해국민학교 뒷산 계곡인 시무나무골 공동묘지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가해자는 경찰을 비롯하여 백골부대 또는 맹호부대라는 소문이 있었다.

 

1949년 말 영덕지역에서 토벌국군에 의해 주민들이 대규모로 희생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2월 23일부터 1950년 1월 사이 영덕 지품면 주민 300여 명이 제2사단 25연대에게 원전리 각별계곡에서 집단희생 당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국민보도연맹들이 크게 희생되었다. 영해면, 창수면 보도연맹원 80여 명이 1950년 7월 8일 국군 3사단 23연대에 의해 어티재에서 집단희생당했으며, 강구지서에 구금되었던 30여 명의 보도연맹원은 7월 14일 강구지서 경찰에 의해 강구 앞바다에서 수장당했고, 영덕경찰서로 이송된 16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영덕경찰서 소속 경찰과 국군 3사단 23연대(김종원 부대) 군인에 의해 뫼골에서 총살당했다.

전쟁이 발발한 후 국군 3사단은 미 8군사령부의 화력지원으로 5일을 버텼다고 한다. 23연대는 7월 19일 영덕을 내어 준 후 영국과 미국의 해군 함포사격을 가한 뒤 21일 저항 없이 영덕을 탈환했으나 다시 철수했다.(2권 585쪽) 24일에는 대구에서 대기 중이던 22연대가 영덕 강구에 증원되었다.

 

<미군폭격 피해>

 

인민군 점령기에 영덕지역의 주민들은 미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었다. 8월 2일 F-80 전투기 4대가 지품면 눌곡리에 폭탄 6기를 투하하여 13명이 사망하고 마을 1/3이 전소되었다.

 

영덕지역의 수복은 1950년 9월 25일 이루어졌다. 강구를 경유한 국군 3사단이 수복했는데, 당시 영덕은 불바다였다고 한다. (한국전쟁사 4, 58쪽)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6. 10. 4.

달산초등학교

2

경찰

전쟁 전

1947. 3. 6.

축산면 대곡리

4

축산지서

전쟁 전

1947. 7. 15.

남정면

4

남정지서

전쟁 전

1948. 8. 30.

축산면

대구 6연대

전쟁 전

1949. 4. 12.~18.

영덕읍 남산리 등

30

2사단

전쟁 전

1949. 11. 5.

영해초등학교 뒷산

10

2사단

전쟁 전

1949.12.~1950.1.

지품면 원전리

300

2사단

보도연맹

1950. 7. 8.~14.

어티재 등

270

3사단 6연대

폭격

1950. 8. 2.

지품면 눌곡리

13

미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