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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안동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1:00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609

<전쟁 전 피해>

 

안동에서는 1949년 6월 30일 녹전면 원천리 주민들이 녹전지서로 끌려가 녹전지서 뒷산 골짜기 등에서 희생당했다.

 

<형무소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안동형무소 재소자와 국민보도연맹원들이 7월 초부터 8월 1일까지 남후면 수상리 ‘청골’과 ‘도둑골’(한티재), 와룡면 태리 기름땅고개(서지미 땅고개) 등 2곳에서 2사단 25연대 군인과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당시 안동지역에서 가장 먼저 희생당한 사람들은 안동형무소의 재소자들이었다.

1949년 8월 안동형무소 재소자 수는 872명이었으며, 전쟁 발발 당시에는 1,2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1950년 7월 15일 형무소가 후퇴하면서 5년 이상의 정치범 200여 명을 학살했으며, 일반사범을 가석방하고, 279명을 대구형무소로, 492명을 부산형무소로 이송했다. 당시 이씨(이상준) 등 형무소 직원들은 재소자들을 죽이고 돌아온 헌병들로부터 “구덩이를 깊게 파지 않아 재소자들을 발로 차 넣느라고 바지에 피가 묻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재소자 외에 안동형무소에는 안동을 비롯하여 영양 등 인근지역 국민보도연맹원 500여 명이 잡혀 와 재소자가 희생당한 같은 장소에서 학살당했다. 안동경찰서와 국군 2사단 25연대 소속 군인들은 1950년 7월 하순 영양, 청송, 안동, 예천, 상주, 의성 국민보도연맹원들을 안동형무소에 수용했다가 안동시 수상동 한티재, 와룡면 태리 기름땅고개, 서후면 성곡리 뒷산계곡 등에서 총살했다. 당시 안동형무소는 7월 15일 후퇴했으며 국군 8사단이 8월 1일까지 안동에 주둔하다 영천으로 후퇴했다. 형무관 권씨(권중수)의 증언에 의하면, 7월 15일 안동형무소가 대구로 피난을 한 뒤 남은 국민보도연맹원들은 경찰이 처리했다고 한다.

2사단 25연대 최씨(최건숙)는 안동에서 후퇴할 때 1중대 1소대원 12명이 안동형무소에 갇혀있던 보도연맹원 200여 명을 트럭에 태워서 안동에서 10리도 안 되는 곳의 다리를 건너 산골짜기에서 총살하고 묻었다고 하였다. 당시 안동형무소에는 400~500명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어 공장에 수용되어 있었다. 수용된 주민들은 며칠 뒤 다시 헌병대가 끌고 나갔다.

한편, 안동형무소 외에 안동경찰서와 산하 각 지서에 의해서도 국민보도연맹원들이 희생되었다.

안동경찰서 의용경찰 박씨(박조균)에 의하면, 당시 안동경찰서 유치장에 20여 명, 무도관에 50여 명, 동부초등학교에 100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7월 30일 군인들에 의해 남후면 쓰레기 집하장 부근, 무릉계곡 부근, 서지미고개 부근에서 총살당했다.

7월 22일에는 서후면의 주민들이 희생당하기도 했다. 당시 서후지서와 백골부대는 서후면 주민 9명을 줄줄이 묶어 지서에서 1km정도 떨어진 성곡리 계곡으로 끌고 가서 대검으로 찔러서 이중 8명을 살해했다. 7월 28일에는 와룡지서가 와룡면의 보도연맹원들을 소집하여 당일 오후 태리 기름땅고개에서 총살했다.

이상 안동형무소사건과 국민보도연맹사건에 대한 증언을 종합하면, 당시 안동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재소자 200여 명과 안동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 500여 명, 안동경찰서 및 산하지서에 의해 연행된 국민보도연맹원 200여 명 등 900여 명이 이 사건으로 학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안동형무소가 7월 15일에 후퇴했다고 하므로 이후부터 8월 1일까지 당했던 희생자들은 모두 국민보도연맹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대구형무소로 이송된 279명 중 116명, 부산형무소로 이송된 492명 중 323명이 7월 30일경 군 헌병대에 인계되어 총살당한 사실이 각 형무소 기록에서 확인된다.

 

<부역혐의 피해>

 

안동지역에서는 수복하던 국군과 경찰에 의해 희생된 주민들도 많았다.

안동에는 7사단, 8사단, 수도사단이 9월 25일부터 진입하기 시작했으며 이들과 함께 경찰도 복귀했다. 이들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된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국군과 함께 복귀한 안동경찰서는 9월 29일 안동읍 태화리 어개골 주민 11명을 연행하여 안동읍 서부리 야산에서 총살했다. 안동읍 태화리 어개골에 거주하던 김일준 외 11명은 인민군 점령당시 피난가지 않고 인민군 측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9월 21일 경찰에 의해 안동읍사무소에 끌려가 감금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9월 29일 안동 서부리 야산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시신은 밤에 큰 아들 등 가족들이 수습하여 안동 선산에 매장하였다. 당시 마을 주민들은 큰골에서도 총살당했다.

남선면 정하리 주민 25명은 9월 25일 북진 중 마을에 주둔한 국군 8사단에 의해 9월 26일 강 건너 영남산 법흥리 상수원 뒤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국군이 여러 날 동안 마을에 주둔했는데, 소․닭을 잡고 보초를 서게 하는 등 실컷 부려먹다 떠나면서 총살한 것이었다고 한다. 국군에 의한 희생사건은 10월에도 이어졌다. 10월 14일 국군 20여 명이 마을에 들어와 인민군 점령기 원림리 인민위원장이었던 김윤동을 찾았는데, 김윤동이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가 집에 없자 인근 산에 피신해 있었던 동생 김원동을 찾았다. 김원동은 다른 마을에서 연행된 사람들과 함께 바로 원림국민학교 앞 둑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남후면에서는 9월 25일 개곡리에 주둔한 국군이 방공호에 피신해 있는 마을 주민들을 소집해 마을 공터에 집결시켰다. 군인들은 전쟁 전부터 마을 구장을 하였고 인민군 점령기 개곡리 인민위원장을 하였던 박응종을 풍산면 계평리 삿시골로 끌고 가 살해하였다. 9월 26일에는 개곡리 주민 2명이 마을 어귀에서 국군에게 연행되어 광음리 암산골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일직면에서는 명진리 이홍복, 김영학이 9월 20일경 수복 과정에서 국군의 짐을 지고 가던 중 명진리 마을 앞산에서 국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같은 마을 김임백 등 27명의 주민들은 9월 29일 일직지서 경찰들에 의해 연행된 후 국군에게 인계되어 남후면 광음리 암산골에서 집단 살해되었다. 일직지서는 1950년 9월 24일 전후 수복하여 부역혐의가 있는 마을주민들의 명단을 파악하고 이들에게 지서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직접 연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직지서 마당 사과나무 아래에 일직면 주민 50여 명 이상이 연행되어 모여 있었는데 걸레자루로 매를 맞으며 조사를 받은 후 잔디뭉치로 만든 방공호에 갇혔다. 일직지서에 연행되어 경찰에게 조사를 받고 방공호에 구금된 일직면 주민 50여 명은 9월 29일 오전 10시경, 지프차를 타고 온 헌병 3~4명에 의해 일직지서 마당에 있는 사과나무 아래에서 한 사람씩 호명되어 재조사를 받은 후 남후면 광음리 암산골에서 살해되었다. 당시 헌병들은 경찰에게 받은 서류를 보면서 한 사람씩 불러내 곡갱이 자루로 마구 때리면서 조사하였다. 그 후 두 부류로 갈라 한 쪽은 새끼줄로 줄줄이 묶어 놓고 다른 한 쪽은 묶지 않고 모여 있게 하였다. 오후 2시경 헌병들은 경찰을 대동하여 새끼줄에 묶여 있던 27명은 트럭에 싣고 남후면 광음리 암산골 하천으로 끌고 가 총살했다.

풍산면 주민들은 9월 25일경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한 국군에 의해 개천과 막곡리 막실마을 인근에서 살해되었다. 국군 8사단 16연대 소속 수색중대는 9월 25일 수동2리에 주둔하였다. 수동2리 김수용, 주영봉, 권상문은 오후 3~4시경 인민군 복장으로 위장한 국군 8사단 16연대 소속 수색중대 군인 2명을 인민군으로 착각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동2리로 가다가 김수용, 주영봉은 수동2리 개천에서 살해되었고, 권상문은 간신히 도망쳐 생존하였다. 수동1리 김수용과 주영봉을 사살한 국군은 저녁에 다시 수동1리로 와서 부역자 색출작업을 하였다. 인민군 점령기에 수동리 마을 일을 보았던 마을 주민 10여 명은 김수영, 주영봉이 살해되고 난 직후 마을 뒷산에 피신해 있었으나 행방불명되었다.

풍산면 막곡리에서는 9월 29일 인민군 점령기 인민위원장을 한 권을수와 자위대장을 한 권영석, 여맹위원장을 한 여성 1명과 박군하 등 박씨 3형제 등 모두 6명이 막실마을 인근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같은 날 막곡리 미리미마을에서도 국군에 의해 장덕익 등 3명이 마을 앞 강변 너머에서 살해되었다.

서후지서는 9월 27일 서후면 자품리 손수원 등 7명을 자품리 부처골에서 총살했다. 인민군 점령 당시 마을 청년들은 대구까지 인민군 포탄을 지고 노력동원을 해야 했다. 9월 27일 복귀한 서후지서는 자품리 동장에게 ‘인민군 쌀이나 물건을 가지고 오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가져갈 것이 없던 마을 주민들은 모두 빈손으로 부처골 재를 넘었다. 그러다가 반대쪽에서 올라 온 3~4명의 경찰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들 경찰은 지서로 가던 주민들 중 손수원 등 7명을 호명하여 남게 하고 김동섭 등 나머지 주민들은 그대로 지서로 가게 했다. 김동섭 등 주민들은 지서로 가는 중 뒤쪽 부처골재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 이들은 지서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시 재를 넘다가 남겨진 7명이 모두 총살당한 모습을 목격하고 마을에 연락하여 시신을 수습하였다. 9월 30일에는 이송천리 김영표를 성곡동 면소재지에서 연행하여 조사한 후 지서 앞산으로 끌고 가 살해했다. 당시 현장에는 김영표 이외에 다른 시신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이들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았다. 10월 2일에는 정용한 등 5명이 경광마을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명1리 주민 권오석은 인민군 점령기 리민청 부단장을 하였다는 이유로 지서에 끌려가 심하게 매를 맞고 온 직후 집에서 사망했으며, 권구준은 인민군이 발급한 이동 허가증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국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하출장소는 9월 29일 주하리 이재태, 이석리, 권재연 일가 4명 등을 연행하여 이하역 맞은 편 골짜기에서 총살했다. 이재태는 당시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 전쟁이 발발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직후였고, 이용순은 와룡면에서 양조장을 운영한 지역유지로 주하리 인민위원장으로 명단에 올라 있다는 이유로, 이석린은 인민군의 강요에 의해 전단지를 부착하였다는 혐의로 연행되었다가 희생된 것이었다. 이상리 주민 권재연은 수복 후 이하출장소 경찰의 호출로 구금되었는데 그의 가족 모친 배씨, 처 박차연, 형수 남주가 밥을 가지고 면회를 가서 이하출장소 경찰에게 항의하다 일가족 4명 모두 희생된 것이었다. 9월 27일 권재연의 형인 권박연도 이하출장소 경찰에 의해 이상리 동짝골에서 살해되었다. 10월 5일 이하리 주민 김종만은 이하출장소 경찰의 호출로 지서로 자수하러 간 후 김계상, 황방진과 함께 이하역 맞은편 골짜기에서 이하출장소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1960년 『국회양민학살진상조사보고서』에는 이들이 이하출장소 주임 경사 김일경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와룡지서 근무자 박씨(박조균)에 따르면, 국군 수복 후 와룡면 주민 50여 명이 부역혐의로 안동경찰서에 이송되어 희생되었는데, 수복 후 부역자 처리는 내무부 치안국 명령에 의해 진행되었으며, 이때 국방부 정훈국도 개입했다고 증언했다.

12월 27일에는 풍천면 구담1리 주민 김용익, 김영린, 김용식 등 3명이 밤 10시경 불려 나간 후 살해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모두 수습되었다.(이 사건은 1960년 『국회양민학살진상조사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9. 6. 30.

녹전지서 골짜기

형무소

1950. 7. 15.

남후면 수상리 등

200

2사단

보도연맹

1950. 7. 15.~31.

와룡면 태리 등

500

2사단

안동형무소

보도연맹

1950. 7. 22.~30.

남후면 무릉계곡 등

200

안동경찰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