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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성주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0:57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084

<전쟁 전 피해>

 

성주에서는 전쟁 전부터 토벌부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가 있었다. 1949년 6월 29일경 월항면 장산리 박갑희가 경찰토벌대였던 ‘노구백 부대’에게 연행되어 성주경찰서에 구금 중 어디선가 희생당했다. 같은 해 가을에는 성주군 금수면 무학리 터술마을 노오분이 토벌부대였던 백골대에게 연행되어 가천면 포천 계곡(일명 ‘신계용사’ 계곡)에서 사살당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성주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소집당해 성주읍 성당, 성주향교 등에 감금당했으며, 초전면 용봉리 ‘너리골’, 벽진면 ‘달창골’ 등에서 학살했다. 기존의 조사나 1960년 4·19직후 보도된 신문기사를 검토해보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아군 후퇴직전과 수복직후에 성주군에서 국민보도연맹 또는 부역혐의 등으로 민간인들이 군경에 의해 피살된 희생자의 수는 400~600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역혐의 피해>

 

인민군이 낙동강전선에서 후퇴하고 9월 24일 미 24사단 19연대와 영 27여단이 성주에 진입했다. 수복 즉시 선발 경찰이 부역자색출을 시작하여 주민들을 연행했으며, 공식 복귀한 성주경찰서는 10월 27일 임시 유치시설에 갇혀 있던 주민들을 선남면 선원리 강변에서 총살했다. 당시 희생자는 48명이었는데, 이 중 월항면 대산리 이하영, 수죽리 박용군의 희생경위가 확인되었다.

희생 소식을 들은 이하영의 처가 강변의 시신들 중 옷고름과 호주머니의 시계를 보고 이하영의 시신을 확인했다. 발견당시 시신은 머리에 총상을 입은 상태로 강변에 매장되어 있었다. 국군 수복 후 대산리 한개마을에서 부역혐의 때문에 희생당한 주민은 이하영 뿐이었다. 월항면 인민위원장, 대산리 인민위원장, 부위원장도 석방되었는데, 아무런 직책도 없었던 이하영이 희생된 이유는 선거에서 떨어진 이호석 후보의 악감정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수죽리 박용국은 월항국민학교와 성주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시기 만주에서 군대 생활을 하였으며, 해방 후 귀국하여 임시교사를 하다가 전매청 시험에 합격했다. 박용국은 해방 후 귀국하여 박노진, 조동준 등의 권유로 도문희, 이세강, 도기석 등과 함께 남로당에 가입했다가 자수한 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전쟁 직후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살해당할 때 살아남은 박용국, 도문희, 이세강 등은 아군이 수복하자 1950년 10월 26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선남면 선원리 강변에서 집단 살해당했는데 가족들은 이듬해 4월 선원리 강변에서 구덩이 16개를 뒤져 죽은 박용국의 시신을 찾아냈다. 손이 뒤로 묶인채 총에 맞았다. 한국전쟁 발발 후 도기석 등은 월항지서에서 나온 경찰관에게 연행되어 행방불명되었고 박용국은 입산하여 피난 생활을 하다가 인민군 점령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와 생활을 하였다. 1950년 10월 26일 박용국은 지서 연락을 받고 출두하였다가 행방불명되었는데 2개월 후 선남면 선원리 강변(날미강가)에서 수 백 명의 희생자들과 함께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었다.

1960년 제4대 국회 양민학살하 진상조사보고서에서 박용국의 양민피살자신고서를 확인하였는데 피살장소는 ‘성주군 선남면 나룻가’, 피살경위는 ‘보도연맹에 가입체포’ 라고 기재되어있었다.

1960년 6월 8일 『영남일보』는 “6․25동란 발발 즉시 적색분자로 지목된 자, 보련가입자 등이 정당한 법적과정을 밟지 않고 학살된 수는 약 6백 명으로 추산했으며 1950년 9․28 수복 후에 진주한 경찰관에 의해 학살된 자는 또한 48명으로 알려졌는데 유족들은 이와 같은 피학살자는 태반이 관제빨갱이로 몰렸을 뿐더러 개중에는 소위 경찰 앞잡이들이 사감으로 빨갱이로 밀고하여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6․25사변이 발발한 후 이곳 성주군내에서는 83년의 음력 9월 17일 밤 선남면의 강변에서 48명이 빨갱이로 몰려 무차별 학살당한 것을 비롯하여 벽진면의 달창골, 초전면의 너리골, 월항면의 가랑비고개 등 8개소에서 약 6백명이 학살되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시체와 학살날짜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날 위령제를 치르고 있는 유족들은 당국의 조사에 의지 않고 유족들이 자발적으로 피학살자의 정확한 인원과 유족들의 억울함을 조사하여 중앙에 대해 특별법의 입법을 건의하리라고 하며 합법적인 수단으로 유족들의 의사를 관철할 것을 유족대표 이삼근씨는 말하였다.”라고 보도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9. 6.~9.

가천면 포천계곡 등

경찰토벌대

보도연맹

1950. 7.

초전면 용봉리 등

부역

1950. 10. 27.

선남면 선원리 강변

48

성주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