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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상주지역사건 종합

2013.07.25 20:55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2980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상주지역에서도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소집 또는 연행당했다. 이들은 경찰서 유치장과 양곡창고에 감금당했다가 7월 17일에는 낙동면 성골에서, 7월 23일에는 낙동면 구잠리 ‘부치데이’ 고개에서 희생되었다. 가해자는 6사단 헌병대였다.

 

국군은 7월 17일부터 25일까지 상주지역 화령장 부근에 주둔하면서 전투를 치렀다. 당시 주둔하던 국군은 1군단 17연대와 1사단이었다. 7월 17일 보은에서 후퇴하던 17연대 1대대가 상주 화령장을 통과하던 중 인민군 선발대가 선행한 사실을 알게 되어 화서면 상곡리에 매복하여 본대를 공격했다. 전쟁 발발 후 동락리에 이어 두 번째 승리로 알려진 이 전투를 통해 17연대 전원이 1계급 특진했다. 7월 18일에는 패잔병 소탕전을 벌인 외에 대규모 접전은 없었다.

7월 19일과 20일 피난민 대열이 끊어졌으며 인민군 그림자도 발견하지 못하고 무인지경의 고요가 계속되었다. 21일 화남면 동관리에서 인민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22일에 1사단이 도착하였는데, 이는 안동으로 이동하려던 중 보은에서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상주로 방향을 돌렸던 것이었다. 23일에는 17연대가 낙동강 전선 건너 대구로 이동하였으며, 이와 교대한 1사단은 25일 미 24연대와 진지를 교대하고 상주군 함창면으로 이동하여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주둔했다. 1사단은 이 시기에 미군에 배속되었으며, 8월 1일에는 미 8군의 계획에 따라 철수하여 낙동강 선에 방어진지를 형성했다. 이후 8월 2일부터 12일까지 전투를 치른 후 칠곡으로 후퇴하였다.

국군이 후퇴하는 동안 은척면 봉중리 안영기 등 5명이 7월 31일 총살당했다. 후퇴하던 수도사단 18연대 군인들은 1950년 7월 30일 하루 동안 은척면 봉중리에 주둔하면서 술도가집 아들로서 당시 반정부활동을 했다고 의심받던 이의상을 자택에서 연행하였다. 그러자 그 집 일꾼들이었던 안영기 등 4명이 이의상의 무고함을 진정하기 위해 군인들을 찾아갔다. 그런데, 군인들은 “너희들도 모두 같은 놈들이다”라고 하면서 모두 마을입구 성황당 부근 건물에 감금하였다가 취조한다며 성황당 나무 아래에서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 늦은 밤까지 고문하던 군인들은 다음 날 새벽 마을을 떠나면서 이들 5명을 끌고 가다가 대구 방면으로 가는 길인 낙동강 상류 은척면 하홀리 소갯골 골짜기에서 모두 총살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의 희생자가 있었던 상주 공성면에서는 인민군 점령기인 8월 5일 공성면에 인민위원회(면 인민위원장 강신호)가 조직되어 9월 6일경까지 활동했다고 한다.

 

<부역혐의 피해>

 

9월 22일경 낙동강전선의 인민군이 후퇴하고 유엔군의 북진이 시작되었다. 9월 25일 상주지역에는 북진하던 국군 1사단 제12연대(연대장 김점곤)가 주둔하게 되었다. 국군 12연대 본부는 청리면 가천리에, 1사단 사령부는 공성면 옥산리에 주둔하였고, 각 부대는 숙박과 휴식이 가능한 인근 민가로 흩어져 주둔하게 되었다. 12연대 본부는 10월 4일까지 상주에 주둔했는데, 부근의 유격병과 인민군 패잔병을 소탕했다고 한다. 소탕작전은 예비사단이었던 당시 1사단의 임무였는데, 12연대가 상주를 담당한 반면 11연대는 괴산, 미원지역, 15연대는 보은지역을 담당했다.

9월 25일 공성면 산현2리에 주둔하게 된 군인들은 마을에 들어서면서 대한청년단원이었던 산현1리 주민 이씨(이태병)이 제공한 정보를 근거로 인민군 점령 당시 인민위원장 등 부역혐의가 있는 주민들을 마을 재실 공터에 소집하였다. 국군은 소집된 주민들을 재실에 가두고 고문, 취조를 하면서 부역혐의가 있다고 판단한 주민과 그렇지 않은 주민을 구분하였다. 국군은 밤 12시경 재실에 갇혀 있던 주민들을 모두 재실 앞 냇가로 끌고 갔으며, 이들 중⃇ 부역혐의가 있다고 판단했던 주민들을 총살했다. 이때 총살당한 주민은 백봉원 등 8명이었다.

그 뒤 연행되었으나 부역혐의가 없다고 하여 총살을 면한 주민들이 총살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사망한 주민들의 시신을 그 자리에 매장했다. 1차 총살이 끝난 후 9월 26일 새벽, 국군들은 다시 총살할 주민들을 잡아와 콩밭고랑에서 총살하였다. 이때 총살당한 주민은 백명월 등 6명이었다. 총살을 피한 주민들은 당시 총살현장에 함께 있었으므로 벌어진 정황을 모두 목격하였다.

9월 26일 아침이 되자 마을 주민들이 총살현장에 모였다. 냇가 희생자들의 시신은 머리카락과 옷가지가 보일 정도로 흙이 옅게 덮여 있으며, 콩밭고랑의 희생자들은 머리와 가슴에 총상을 당해 포개져 있었다. 콩밭고랑의 희생자 6명 중 4명이 여성이었는데, 윤간당해 모두 속옷이 벗겨진 상태였다.

 

001.jpg 

(공성면 산현2리 콩밭고랑 현장. 지금은 논이 되었다. 2010년 1월 7일 촬영)

 

같은 날 상주 청리면 가천리에 주둔했던 국군 역시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연행하여 마을회관에 감금하였다. 국군이 들어 온 날 아침, 김철원은 추석 명절 제사를 지낸 후 목화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중 국군에게 불려갔다. 김철원이 끌려간 날 저녁에 그의 처가 마을회관에 남편과 고종사촌 김찬호(국민학교 선생), 이태하, 김형문, 김형우 등 10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갇혀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같은 날 밤 12시경 총소리가 많이 났고 잡혀있던 주민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은 군인들이 떠나자 실종된 주민들을 찾아다녔는데, 마을 뒤 방천에서 10여 명의 시신이 널려 있는 모습을 목격하였으나 김철원 등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 며칠 뒤인 1950년 10월 1일 마을 입구 철로 하천변 양쪽에서 매장되어 있던 김철원, 이태하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김형문 등 마을회관에 갇혀있던 또 다른 주민들은 9월 28일 사단본부가 있던 공성면으로 끌려간 뒤 소식을 알 수 없었으나 옥산리 창말 산제비골짜기에서 총살되었다는 소문이 났다. 당시 산제비골짜기에서는 수십 명의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사』에 의하면, 국군 수복 후 상주경찰서는 9월 26일부터 10월 26일까지 145명을 사살하고 133명을 생포했다고 한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보도연맹

1950. 7. 17.~23.

낙동면 성골 등

6사단

소개

1950. 7. 31.

은척면 하흘리 소갯골

5

수도사단

부역

1950. 9. 25.~26.

공성면 산현리 등

30

1사단

부역

1950. 9. 28.

공성면 옥산리

수십

1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