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나주지역사건 종합

2013.07.24 22:28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760

<전쟁 전 정치적 피해>

 

전쟁 전인 1949년 10월 6일 나주 다도읍 암정리에 진입한 다도지서 경찰에 의해 강대천 등 마을 주민 8명이 지서로 연행되었다가 이중 5명이 마을 입구인 멧골에서 총살당했다.

1949년 10월 31일 미군과 경찰은 1천여 명의 시위 농민들에게 발포하여 13명을 살해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 직후에는 나주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나주경찰서에 의해 희생되었다. 당시 나주경찰서는 국민보도연맹원을 나주경찰서 유치장과 무덕전에 구금했는데 1950년 7월 15일 이중 70여 명을 영산포읍 동수리 온수골에서 집단학살했다. 나주경찰서 근무자 증언에 따르면, 당시 희생된 국민보도연맹원들은 갑 등급에 해당된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 관여한 기관은 5사단 20연대 헌병대와 나주경찰서 경찰이었다. 한편 남평역 파출소장이었던 송씨는 30여 명의 주민들을 예비검속했으나 나주경찰서에 ‘미리 도망가 한 명도 잡지 못했다’는 내용의 보고를 한 뒤 그날 저녁 모두 풀어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

 

인민군 후퇴시기에도 나주에서 주민피해가 있었다. 공성면 분주소로 연행됐던 주민 6~7명이 1950년 9월 28일 총살당한 것이었다.

 

<경찰 토벌 피해>

 

인민군이 후퇴하자 나주 등 전남지역에서는 전투 없이 경찰이 복귀했다.

나주에서는 인민군이 후퇴하는 즉시 나주경찰서 경찰과 의경이 나주경찰특공대를 편성하여 각 면으로 토벌작전을 나갔다. 반면 나주지역에서 11사단의 토벌작전은 상대적으로 소규모였고 대규모 토벌작전은 경찰토벌대가 주도했다. 당시 의용경찰이었던 김씨(김범중)에 따르면 나주경찰서 산하 지서조직인 영산포지서, 노안지서부터 복구되었으며 작전은 왕곡, 공산, 동강, 봉황, 세지, 다도면 순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작전 중 부역자로 판단된 주민들을 총살했으며 빨치산에 협력한 것으로 의심되는 경우도 총살했다. 이로 인해 경찰이 처벌받는 경우는 없었다. 당시 경찰관 공명희가 잔학행위로 악명이 높았다. 나주경찰서의 토벌작전 중 희생사건으로 확인된 사건들을 사건발생 일자 순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50년 10월 7일 복귀한 나주 경찰은 영산포읍 대흥리을 포위하여 주민들을 집결시켰다. 그러나 집이 외따로 떨어져 있어 김석호는 집합하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집에 있다가 가택수색 하던 경찰에게 사살당했다.

 

1950년 11월 20일 나주경찰이 세지면 방면에서 올라와 봉황면 신동리에 왔다. 경찰은 신동리 탑동마을을 포위하면서 진입하였으며 이들은 어린아이까지 포함하여 주민 모두를 마을 뒷산 고개로 집결시켰다. 이어 부역자를 색출한다며 혁대와 총 개머리판으로 주민들을 때렸다. 매를 이기지 못한 주민들이 이름을 말하기도 했으며, 한 사람씩 일일이 얼굴을 보면서 젊어 보이는 사람들을 추려내기도 했다. 경찰은 이렇게 하여 선별한 주민 6명을 마을 아래로 끌고 가 총살하였다. 당시 경기관총 사수로 동원되었던 나주경찰서 의경 고씨(고승화)는 경찰이 탑동 주민 13명을 살해하려는 모습을 보고 이 중 2명을 아는 사람인 것처럼 꾸며 구해냈다고 한다.

 

1950년 11월 28일 아침 30여 명의 나주경찰이 봉황면 운곡리를 포위하고 주민들을 모두 집결시켰다. 경찰은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안영채 등 4명을 끌어내 이웃 용곡리 미사마을로 끌고 가 “나는 아무 죄가 없다. 살려 달라”는 주민들을 인정사정없이 구타했다. 이어 월곡재에서 3명을 총살했다. 현장 생존자 양성암에 따르면, “살려면 도망가라”라고 한 후 경찰들이 도망가는 사람을 뒤에서 쏘았다고 한다.

 

1950년 12월 18일에는 2대의 트럭을 타고 온 나주경찰이 총을 쏘면서 문평면 옥당리에 들어와 주민들을 집합시켰다. 경찰은 주민들을 모아놓고 구타하던 중 한 집에서 인기척이 나자 무조건 집중사격을 가했다. 당시 할머니 김대용은 나이 많은 노인이라 나가지 않고 집에 있었는데 총소리가 나자 6살 손자를 데리고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이걸 본 경찰이 집안을 향해 집중사격을 했던 것이었다. 김대용이 죽자 경찰은 주민들을 해산시키고 되돌아갔다.

 

1951년에 들어서도 나주에 대한 11사단과 경찰의 토벌작전은 계속되었으며 1월에 집중되었다.

1951년 1월 19일 새벽부터 들리는 총소리에 놀란 다도면 주민들이 주랭이마을 쪽으로 피난하였다. 주민들은 산속 깊이 자리한 주랭이마을이나 산월마을로 가면 안전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민들이 피난 다니던 길목에는 이미 경찰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은 골짜기에서 몰려오는 주민들을 붙잡아 주랭이재로 끌고 올라와 젊은 남성을 선별해 3~4열 횡대로 꿇어앉히고 연설을 한 다음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사살하였다. 이날 30여 명이 집단 살해됐다. 같은 날 경찰들은 남판저수지 옆 골짝에 피신해 있는 송학리․판촌리 주민들을 체포하여 옆 산봉우리로 데려가 총살했다. 현장 목격자에 따르면 당시 현장 부근에 50구가 넘는 시신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한편, 경찰의 토벌작전을 피해 피난민들이 산월마을로 몰려들었는데, 여기에는 주랭이재에서 나주경찰의 포위망을 벗어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골짜기를 벗어나 산월마을로 접어드는 입구에는 이미 화순경찰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순경찰은 주민들을 붙잡아 한 곳에 집합시켰다. 산월마을 위쪽의 녹동과 아랫마을 갈마․수한동 주민들도 “모여라” 소리치며 수색하는 경찰에게 붙잡혀 산월마을로 끌려왔다. 경찰은 수백 명의 주민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한 다음 젊은이 1백여 명에게 포승을 채우고 화순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이날 화순으로 끌려간 사람 중 30여 명은 2~3일 후 풀려나기도 했으며, 다른 10여 명은 나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50여 명은 실종되었는데, 대부분 화순경찰서 관내에서 희생되었다. 신동리 주민들도 총소리를 듣고 산월마을 쪽으로 피난하였다. 김윤곤 등 5명은 수한동 쪽으로 넘어가다 속칭 ‘비바위’ 부근에서 경찰들과 마주쳤다. 인민군으로 변복한 경찰이 ‘인민군한테 뭐 해줬나?’ ‘인민군 어디까지 갔다 왔냐?’ 물어보고는 한 사람씩 그 자리에서 총을 쏘았다. 이 날 김삼차 등 5명이 희생되었다.

 

1951년 1월 23일 봉황면 덕림리에 진입한 나주경찰은 주민들을 마을 앞에 있는 큰 밭으로 집결시켰다. 이들은 주민들 중 동생이 산으로 도망한 임길순 등 6명을 끌어내 그의 모친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임길순을 총살했으며 나머지 5명은 봉황지서로 끌려갔다가 며칠 후 무사히 풀려났다.

 

1951년 2월 24일 나주경찰서 특공대(소대장 공명희)가 송현리 주민 3명을 지서로 연행하여 고문했으며, 이틀 뒤인 26일 20여 명의 경찰들이 이들을 끌고 철천리 3구인 선동마을에 진입했다. 새벽에 작전하듯 선동마을을 포위한 경찰특공대는 주민들을 소집한 뒤 미리 작성한 명단에 따라 11명을 연행했다. 이어 이웃인 철천리 철야마을에서 다시 명단에 따라 18명을 연행했다. 이들은 모두 32명의 주민들을 철천리 철야마을 뒷산 동박굴재로 끌고 가 12시 즈음 총살했다. 그런데, 이 중 3명은 현장에서 달아났으며 1명은 시신더미에 숨어 생존했다. 당시 경찰은 2차례에 걸쳐 총을 쐈는데, 먼저 노인들을 선별하여 살해한 후 나머지를 사살했다고 한다. 봉황위령비에는 이 날 희생된 주민 30명의 명단이 새겨 있다. 이 사건에 대해 내무부 치안국 비상경비총사령부는 1951년 3월 2일자 「한국경찰대 적 동향 일일보고서(Daily Enemy Activity Report)」에서 나주에서 같은 해 2월 26일 24시 “약 50명의 적들이 철천리 뒷산에 재결집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1명의 봉황지서원들이 즉시 현장에 출동하여 조우한 빨갱이 50명을 공격한 결과 적 28명을 사살하고 소 1마리를 노획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가해 경찰의 일부는 1950년 7월 26일 해남, 완도, 진도에서 ‘나주경찰부대 사건’을 일으켰던 경찰들이었음이 확인되었다.

 

1951년 6월 24일 오전 8시경 나주경찰이 총을 쏘면서 문평면 국동리 동막골(학치) 쪽으로 들어왔다. 경찰들은 논밭에서 일하던 주민은 물론 가가호호 수색하면서 집에 있던 주민들을 나오라고 하여 학치와 월동 사이 큰 밭으로 집결시켰다. 그 후 경찰은 마을 전 가옥에 불을 질렀다. 경찰은 집결한 60여 명의 주민들 중 ‘군경가족 나오라’고 하여 아랫마을로 내려 보낸 다음 남은 주민들을 향해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이날 당시 14세였던 김재호가 복부에 총상을 입었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숙부, 누나, 동생 2명 등 6명의 가족을 잃었다.

한편, 1960년 6월 13일자 『동아일보』에도 이 사건이 보도되었다. “…(전략) 그해 음력 5월 20일(1951년 6월 24일) 아침 부락 앞 학정산에서 전투복을 착용한 경찰관 약 80여 명이 난데없이 총을 쏘며 마을에 들어와서는 ‘이 마을에서 산사람을 유숙시킨 일이 있다’고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우고는 두 살 먹은 젖먹이로부터 임신 중인 부인과 73세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무조건 부락 앞 보리밭에 집합시킨 다음 가산을 모조리 압수하는 한편 가옥은 물론 돼지우리까지도 모두 불태워버렸다. 나주 특공대란 이들 경찰관들은 다시 양민들에게 아무런 심사조차 없이 기관총과 소총을 마구 퍼부어 학살을 감행하였다는 것이다. 경찰은 그 길로 문평면 일대의 각 부락에 불을 놓았다고 한다. 노환으로 방안에서 나올 수조차 없었던 기우부락의 이섭건(74) 노인도 이들의 총에 맞아 즉사하였으며 이러한 경찰 만행에 불만의 표정을 보인 양민들과 피난 나가던 심종(73) 노인 등도 모두 사살 당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경찰은 자녀들의 혼사에 쓰려고 푼푼히 모아둔 ‘광목’, ‘무명베’ 등 ‘가산’을 각 부락에서 송두리째 약탈하여 미리 동원된 인부들로 하여금 나주경찰서에 운반해 갔다고 한다.(후략)…

나주경찰서 의경이었던 김범중에 따르면, 왕곡면에서도 토벌작전 중 부역자 집단 학살이 있었으며 이 중 1명을 숨겨 살려주었고 한다.

 

<11사단 사건>

 

세지면의 주민들은 경찰토벌보다는 주로 11사단의 토벌작전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

1951년 1월 20일 세지면 오봉리․벽산리 주민들과 영암에서 온 피난민 등 140여 명의 주민들이 국군 20연대 2대대 5중대(중대장 권준옥)에 의해 오봉리 동창교 일대에서 집단희생되었다.

사건 당일 100여 명의 국군은 세지면 지서 경찰, 세지면장, 구국총력연맹원, 지역유지 등과 함께 나주시 영산포를 출발하여 세지면을 향했다. 이들은 오던 중 마주친 행인 2명을 총살했으며, 주민 백형렬을 체포하여 세지면 오봉리(동창)로 진입하였다. 이후 오봉리·벽산리를 집집마다 뒤져 주민 200여 명을 동창교 아래 만봉천 개천가로 강제로 집결시킨 뒤, 노점순과 그의 아기, 위 백형렬을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했다. 이어 군·경 가족들을 제외하고 청·장년층 남자 100여 명을 선별하였으며, 동창교 인근 신북여관 밭으로 끌고 가 12명씩 8열 종대로 세워놓고 순서대로 총살하였다. 같은 날 인근 깍정굴마을과 인근 야산에서도 40여 명의 주민들이 국군에 의해 희생당했다.

이 사건에 대해 1960년 5월 24일 『전남일보』는 “(음력) 4283년 12월 13일 낮, 영산포 쪽에서 국군 화랑부대 1개 중대가 입성하여 약 2백 명의 남녀노소 부락민을 동창교 밑 만봉천 개천가에 모아놓고 군경가족을 제외한 뒤 청장년 138명을 골라내 사살하였다”라고 보도하였다.

<부역혐의 피해>

 

10월 6일 복귀한 나주경찰서는 부역혐의를 받던 주민들을 경찰서나 지서로 연행하여 학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나주지역에서 확인한 부역혐의 사건은 15개 읍면 중 나주경찰서와 문평지서, 봉황지서에 의한 것이다. 나주경찰서와 각 지서에는 인민군 측에서 작성한 부역자 명부가 남아있었으며, 뚜렷하게 부역혐의를 받았던 주민들은 경찰서 본서로 연행되었다. 나주경찰서는 각 지서를 거쳐 연행·이송된 주민들을 나주대교 부근 등에서 총살했다. 희생자로 확인된 문평면 옥당리 나석운은 12월 20일 문평지서로 연행되었다가 나주경찰서로 이송되어 유치장에 감금되어 있던 중 함께 감금되었던 주민들과 함께 나주대교 밑 영산강변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다리 밑에는 시신이 즐비했다고 한다. 조사에서 확인된 또 다른 희생자 나석운은 12월 18일 나주경찰에 의한 토벌작전 중 문평면 옥당리에서 경찰에게 학살당한 김대용을 조문 갔다가 잡혀간 것이었다.

 

나주경찰서 외에 산하 각 지서에 의해서 희생당한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문평지서는 국군 수복 후 연행한 주민들을 옥당리 공동묘지와 산호리 뒷산 등에서 총살했다. 1950년 11월 중순 다시지서 경찰은 인근 지역인 문평면 옥당리에서 잘린 전신주에 대해 조사한다며 주민들을 연행하여 조사했다. 연행된 주민 대부분은 조사를 마친 후 석방되었으나 양성만 등 2명의 주민은 11월 20일 경찰 2명에 의해 마을로 끌려 돌아온 뒤 마을 안에서 총살당했다. 1950년 12월 12일 산호리 이장이었던 전윤섭은 경찰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녀야 했으며 그의 처가 대신 지서에 잡혀가 고문을 당했다. 그는 도망 다니다가 잡혀 대도리에서 총살당했다고 하나 시신은 찾지 못했다. 12월 21일 산호리 유옥녀는 아들 3형제가 입산자라는 이유로 이종동생 나말동, 며느리 김복림과 함께 문평지서 경찰에게 산호리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1951년 2월 3일 문평지서에 수감되어 있던 오룡리 나문현, 차영철이 옥당리 공동묘지에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봉황지서는 부역혐의를 받던 면내 주민들을 연행하여 고문·조사를 한 후 ‘바재’ 등에서 총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자료에 따르면 용전리에서는 모두 9명의 주민들이 부역혐의로 총살당했다. 1950년 11월 13일 용전리 이진범은 봉황지서 경찰에 연행된 뒤 구석리 속칭 ‘바재’에서 경찰에 사살되었다. 1950년 11월 26일 죽석리 박갑천 등 3명의 주민들이 봉황지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경찰은 박씨 집 지하 배저장고에서 이불 등을 발견하고는 적들을 은신시켜 줬다며 일가족 5명을 붙잡아 지서로 연행하였다. 당시 12세였던 박대석과 죽석리 박씨의 동창이었던 최민희는 풀려났으나 박갑천 등 3명은 총살되었다. 봉황지서는 용전리 홍홍개 등 6명에게 입산자의 가족이라며 전신주를 지키게 했는데, 1950년 12월 31일 전신주가 절단됐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총살당했다. 이들의 희생사실을 알지 못 했던 가족들이 대신 야경을 가기도 했다. 1951년 1월 31일 봉황면으로 피난한 김상기 등 다도면 주민 10여 명이 봉황지서 앞에서 지서 경찰에게 살해되었다. 당시 희생자들은 경찰의 소개 명령에 따라 봉황면으로 피난 갔다. 그 후 봉황지서 경찰은 ‘피난민들은 모두 자수하라’라고 하면서 부역 혐의가 있거나 가족 중 입산자가 있는 주민들을 연행하여 구타하고 고문하였다. 지서에서는 이들의 명부를 관리하면서 토벌작전 중 군경 측에 전사자가 생기거나 빨치산이 지서를 습격하는 사건이 생기면 이들을 다시 연행하고 살해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미군폭격 피해>

 

나주지역에서는 국군이 토벌작전을 벌이던 시기에 미공군의 폭격에 의한 피해도 있었다. 1951년 1월 20일 나주 다도면 덕림리, 도동리, 방산리 주민들이 국군 11사단 20연대와 합동작전을 펴던 미 5공군 18전폭전대 소속 전투기 4대에 의해 폭격을 당했다. 당시 전투기는 마을 주택과 주민을 목표로 정확히 폭격했다. 이로 인해 10여 명의 주민이 피해를 입은 사실이 확인되었을 뿐 더 이상 조사되지 않았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9. 10. 6.

암정리 멧골

5

다도지서

전쟁 전

1949. 10. 31.

13

미군

보도연맹

1950. 7. 15.

동수리 온수골

70

5사단

인공

1950. 9. 28.

공성면

5~6

나주내무서

토벌

1950.10.~12.

봉황면 등

12

경찰특공대

부역

1950.12.~1951.

나주대교 밑

나주경찰서

토벌

1951. 1. 20.

세지면

140

11사단

토벌

1951. 1. 19.

다도면 산월리 등

140

경찰특공대

폭격

1951. 1. 20.

다도면 덕림리, 도동리

10

미군

토벌

1951. 1. 23.

봉황면 동박굴재

30

경찰특공대

토벌

1951. 6. 24.

문평면 국동리

6

경찰특공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