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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곡성지역사건 종합

2013.07.24 22:22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425

<전쟁 전 정치적 피해>

 

전쟁 전 구례, 남원, 순창과 접해 있던 곡성지역 역시 여순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1948년 11월에는 석곡면 주민 10여 명이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척살된 것이 확인되었다.

1949년 6월부터 10월 사이에는 경찰토벌대에 의해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6월 18일에 마준화 등 3명의 주민들이 곡성경찰서 소속 토벌대에게 끌려가 석곡면 방송리 밭에서 희생되었으며, 7월 26일에는 율사리 금단보를 관리하던 박판순이 옥과지서 경찰 토벌대에게 희생되었다. 10월 10일에는 신삼균 등 4명의 죽곡면 원달리 주민들이 마을 회관 앞 ‘감나무동 개울’에서 군인들의 총검에 살해당했다. 당시 총에 칼을 꽂은 군인들이 이들 4명을 찔렀으며 그 다음 희생자의 형제들을 불러내어 다시 찔러 죽이게 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곡성지역 주민의 피해는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봄에도 있었다. 당시 삼기면 수산리 주민 3명이 곡성경찰서 사찰계에 의해 석곡면 염곡리 논에서 총살당했는데, 당시 곡성경찰서 보안계 근무자가 이 사실을 목격하고 증언했다. 5월 16일에는 옥과지서에서 조사를 받던 무창리 김만수가 소룡리 주민 1명과 함께 경찰토벌대에 의해 무창리 강변에서 희생되었다. 당시 경찰토벌대는 모두 15명을 총살하려고 했으나 이를 보고 달려 온 옥과지서장의 만류로 희생자는 2명에 그치고 13명은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곡성경찰서로 소집 또는 연행당했다. 경찰서 유치장 등에 감금되었던 주민들은 1950년 7월 16일에서 7월 19일 사이에 곡성읍 도림사 인근 야산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곡성경찰서 근무자 김씨(김갑기) 증언에 따르면 곡성군의 국민보도연맹원은 200여 명이었고 전쟁이 발발하자 곡성경찰서 사찰주임이 갑을병으로 분류하여 갑종에 해당하는 주민 15명을 즉결처분한 것이었다고 한다. 오곡지서에 구금되었던 보도연맹원 등은 곡성경찰서로 이송되지 않고 오곡면 침곡리 ‘바람재모퉁이’와 곡성읍 신기리 ‘당등’에서 총살당했다.

 

<미군폭격 피해>

 

인민군이 곡성을 점령한 시기에 미공군 폭격에 의한 주민피해가 있었다. 1950년 7월 말 오후 2시 미 전투기 2대가 곡성 옥과면 수리마을을 폭격하여 1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을 입었다.

국군 수복의 시기 복귀한 곡성경찰서는 특이하게도 부역혐의 주민을 색출하는데 있어 인민군이나 빨치산 복장으로 위장하여 유인했는데,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이는 1950년 10월 10일 곡성읍 기우일이 변복한 경찰을 ‘동무’라고 불러 연행된 사실에서 확인되었다. 이렇게 잡힌 주민들이 곡성경찰서로 연행되어 유치장에 감금되었다. 11월 7일에는 유치장에 감금되었던 주민 중 20여 명이 곡성읍내 묘천리 냇가에서 총살당했다. 곡성경찰서 보안계 김씨(김갑기, 1929년)은 총살 후 어떤 사정으로 죽였다는 인지보고서만 쓰는 식이었으며, 야간에 정지 명령에 불응할 경우에도 즉결처분하고 인지보고서를 사찰계에 제출하면 문제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곡성경찰서 압록출장소 박씨(박형대, 1925년)에 의하면, 즉결처분 결정은 사찰주임이 서장한테 보고를 하고 집행했다고 한다.

 

<11사단 사건>

 

곡성에서도 11사단과 관련된 피해가 나타난다. 1951년 3월 말 곡성 주민 20여 명과 화순 북면 이천리에서 11사단 20연대 노무자로 강제동원되었던 김중현이 옥과면 율사리 가죽바위(옥과면과 오산면의 경계지점)에서 곡성경찰서 토벌부대에게 총살당했다. 시신은 1951년 4월 4일 옷을 보고 가족들이 수습했는데 당시 가매장되었던 20여 구의 시신이 함께 발견되었다. 이 사건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곡성경찰서 기동대장 김씨(김갑기)는 1951년 3월 사찰계가 옥과지서에 감금되었던 주민 13명을 무창 강변에서 사살하려던 중 지서장의 만류로 1명만 희생된 적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토벌작전에 참여했던 곡성경찰서 토벌대원 최씨(최봉규)에 의하면, 토벌부대가 빨치산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 출동할 때 마을로 진주하기 전에 마을을 향해 총을 발사한 후, 진주하였는데 이것은 토벌대가 죽지 않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한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8. 11.

석곡면

10

전쟁 전

1949. 6.~10.

석곡면, 죽곡면

10

경찰토벌대

전쟁 전

1950. 봄.

석곡면 염곡리 등

5

곡성경찰서

보도연맹

1950. 7. 16.~19.

도림사 야산 등

15

곡성경찰서

폭격

1950. 7. 말.

옥과면 수리마을

1

미군

부역

1950. 11. 17.

묘천리 냇가

20

곡성경찰서

토벌

1951. 3. 말.

율사리 가죽바위

20

경찰토벌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