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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광양지역사건 종합

2013.07.24 22:19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4268

<전쟁 전 정치적 피해>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은 광양지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광양지역의 여순사건은 광양경찰서와 국군 15연대에 의해 저질러졌다. 1948년 10월 말 광양경찰서가 30여 명의 주민을 연행하여 광양읍 덕례리 반송재에서 집단 학살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1949년 6월 25일 다압지서에 갇혀 있던 금천리 최순용 등 10여 명의 주민들이 다압지서 뒤 도로가에서 희생되었다. 1949년 8월 3일에는 진도 임회면 박월암이 경찰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다 체포되어 용호리 골짜기에서 총살당했다. 1949년 9월 16일에는 광양읍 주민 32명이 광양읍 덕례리 반송재에서, 19명이 광양읍 세풍리 뒷산에서, 40여 명이 광양읍 우산리 ‘쇠머리’에서 살해당했다. 이외에도 같은 시기에 광양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진상면 어치리 서순모 내리 40여 명, 옥룡면 죽천리 박노준 등 10여 명, 옥곡면 묵백리 30여 명, 옥룡면 추3리 12명 등 100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구랑실재 등에서 집단 살해당했다.

경찰 외에 1949년 7월에 있었던 국군 15연대의 토벌작전에 의해서도 큰 희생이 있었다. 사건 당시 민간인 즉결처분장면을 목격한 15연대 김씨(김창순, 1대대 2중대)에 의하면, 1949년 9월 16일 광양경찰서 습격사건 이후 군경이 민간인을 집단 총살했으며, 광양경찰서 주둔 시 마을에서 좌익 혐의 민간인을 색출, 여성 포함 3~4명을 광양경찰서에서 멀리 떨어진 야산 골짜기에 구덩이를 파고 총살한 후 구덩이에 매장했다. 당시 15연대 군인들을 특정인이 좌익이라고 지목되거나⃅의심되면 남녀 구분과⃅조사조차 없이 무조건 연행하여 총살하였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던 주민들이 1950년 7월 17일경 경 순천시 서면 압곡리 구랑실재(또는 반상쟁이 고개)와 광양에서 하동방향의 고개에서 집단희생 당했다. 당시 광양경찰서 사찰계 근무자 김씨(김재호)는 이들이 트럭에 실려 하동방향 계곡으로 끌려갔다고 증언했으며, 나씨(나승석)은 희생된 시신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 또 다른 사찰계 근무자에 따르면, 반상쟁이 고개에서 희생된 보도연맹원들은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미군폭격 피해>

 

인민군 점령기에 미군폭격에 의한 피해도 있었다. 1950년 8월 27일 오전 8시경 미 전투기 1대가 광양읍 인동리를 폭격하여 주민 3명이 사망했다.

 

<부역혐의 피해>

 

광양지역에서 수복 직후의 부역혐의사건은 확인되지 않는데, 11월에 접어들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광양경찰서는 광양읍 세풍리에 살던 허장오 등 4명을 연행하여 1950년 11월 13일 광양-순천간 무선쟁이고개에서 총살했다. 이외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주민들이 희생되었는데, 광양경찰서는 1951년 1월 16일 옥룡면 율천리 장임식 등 광양군내 40여 명의 주민들을 트럭에 싣고 광양읍 덕례리 반송재 골짜기로 끌고 가 총살했다. 같은 날인 1951년 1월 16일 홍석모, 최채용, 성용수 등 50여 명의 주민들도 광양읍 세풍리 뒷산 검단재에서 총살되었다. 옥곡지서는 묵백리 1구장 정태용을 1950년 12월 3일 연행하여 12월 4일 지서 옆 골짜기에서 총살했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8. 10.말

덕례리 반송재

30

광양경찰서

전쟁 전

1949. 6.~9.

구랑실재 등

200

광양경찰서

전쟁 전

1949. 7.

경찰서 인근

15연대

보도연맹

1950. 7. 17.

구랑실재, 반상쟁이

광양경찰서

폭격

1950. 8. 27.

인동리

3

미군

부역

1950.11.~1951.1.

무선쟁이고개

100

광양경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