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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봉화지역사건 종합

2013.07.17 12:59

인권평화연구소장 조회 수:3059

<전쟁 전 토벌 피해>

 

여순사건 이후 대구에 주둔하던 6연대 군인들도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와 관련하여 봉화지역에서 민간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 사이에 3차에 걸쳐 발생한 ‘대구 6연대사건’이 진압되면서 살아남은 군인들이 팔공산으로 입산하였고,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봉화군에는 속칭 ‘산호(山虎)부대, 백골부대, 녹귀(綠鬼)부대’라는 국군이 주둔하였다. 이들 중 산호부대 일부 병력이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에 있는 춘양국민학교에 주둔하면서 민간인들이 희생되었다. 1949년 2월 춘양면에 진입한 군인들에 의해 정홍일 등 많은 주민들이 춘양면 금정골에서 희생당했다. 6월 19일에는 봉화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주민 4명이 희생되었다.

 

<국민보도연맹사건>

 

전쟁 발발 직후 봉화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연행된 주민들은 봉화경찰서 무덕관에 감금되었다가 GM트럭에 실려 안동 녹전면 원천리 영장골에서 총살당했다. 영장골의 움푹한 구덩이에는 30여 명의 사람들이 줄에 묶여서 총살당한 채로 있었다. 당시 현장은 애국청년단 부단장이었던 박씨(박신규)가 목격했다. 박씨는 총살당한 사람들의 시신을 묻으라는 경찰의 명령에 딸 애국청년단 단장 우씨(우봉구)와 함께 시신을 매장했다고 한다. 물야지서는 1950년 7월 10일 지서로 연행되었던 10여 명의 보도연맹원들을 트럭에 싣고 나가 물야면 솔고개에서 총살했다.

 

<부역혐의 피해>

 

9월 27일 수도사단 18연대 등이 봉화군 춘양면을 수복했다고 하는데,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봉화경찰서는 9월 24일 춘양면 문주산에서 봉화군당 등 120명을 공격하여 45명을 사살하고 34명을 생포했다고 한다.(734쪽)

인민군 점령지역이었던 봉화지역에서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희생된 사건은 1951년 초에 나타났다.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내리 임억수 등 4명이 1951년 4월 11일 원경묵 등 봉화군 방위대원들에 의해 총살당했다. 원경묵은 이 사건으로 인해 1951년 6월 2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에서 ‘불법체포․감금, 상해치사, 사체유기’죄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은 바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당시 원경묵은 방위군 중위로 방위군 11단 42지대 직속 전투중대장이었고, 봉화군 내성면(현 봉화읍) 유곡리 권정양 가옥을 차용하여 60명의 방위군 사병과 함께 주둔하며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했는데, 1951년 2월 5일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에서 빨치산과 교전 중 영월군 하동면 내리 주민 임억수 외 수 명의 이름이 기재된 문서를 발견, 이들을 빨치산 협력자로 판단하여 체포한 후, 일부는 42지대 본부로 후송시키고 임억수를 포함한 일부는 4월 11일 살해한 것이었다.

 

이상 봉화지역에서 확인된 피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사건발생일

희생장소

희생자 수

가해조직

비고

전쟁 전

1949. 2.~6.

춘양면 의양리 등

2 또는 3사단

보도연맹

1950. 7. 10.

물야면 솔고개

10

물야지서

보도연맹

1950. 7.

안동 영장골

30

봉화경찰서

부역

1950. 9. 24.

춘양면 문주산

45

봉화경찰서

『한국전쟁사』

부역

1951. 4. 11.

물야면 오전리

4

국민방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