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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

1. 고양지역의 전쟁 전 사회상황

8․15 해방 직후 고양지역에서도 건국준비위원회 등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정치, 사회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했다. 자료에서 당시 고양지역의 농민들이 농민조합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례가 확인된다.

미군정은 친미우익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1946년 10월 9일 민족청년단(단장 이범석)을 결성하도록 지원하였으며,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기반 확대를 위해 1947년 9월 21일 대동청년단(총재 이승만, 단장 이청천)의 결성을 지원하였다. 고양지역에서 우익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단도 만만치 않게 조직되어 있었다. 자료에 따르면, 고양지역의 초대 대동청년단 단장은 이경하였으며 간부 및 단원은 이은칠, 강금로, 강영신, 김금룡, 강흥환, 이진, 최의현(마두리 단장, 금정굴사건 희생자) 등이 있었다.

1946년에 발생한 9월 철도총파업 사건, 이어 발생한 대구 10월 사건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경기도 지역에서도 10월 20일 경부터 시위가 발생했으며 고양지역에서도 이듬해인 1947년 2월 16일 원당면에서 우익계의 대한독립청년단원과 좌익계의 민주청년동맹원이 충돌한 일이 있었다.

본격적인 갈등은 남과 북의 단독정부 수립과정에서 발생했다.

1947년 미군정은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됨에 따라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1948년 2월 7일에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2․7 투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다. 고양, 파주, 포천 등에서도 2월 7일과 8일에 걸쳐 500여 명의 농민들이 연대하여 군중시위를 벌였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과 미군정은 부족한 경찰력을 지원하기 위해 1948년 4월 17일 각 지역을 단위로 향보단(鄕保團)을 조직하였다. 향보단은 비록 경찰 직속기관이 아니고 자치기관임에도 향보단원에 대한 훈련 및 비상시 지휘명령권은 각 경찰서장에게 있었다.
향보단은 부정선거과 폭력행사로 많은 폐해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고 1948년 5월 25일 군정장관 딘의 명령에 따라 해체되었다. 그러나 향보단은 이미 만들어진 목적을 달성한 뒤였으며, 해체된 이후 민보단(民保團)이란 이름으로 부활하였다.

민보단은 우익청년단원이나 반공사상이 투철한 인사들로 대부분 관할서장의 추천으로 뽑혔다. 민보단은 1948년 10월 9일 서울시내 각 구청별로 창단되었다. 경찰은 민보단의 조직이유에 대해 경찰관만으로는 치안을 유지하기 곤란하므로 이에 협조를 받고자 조직했다고 한다. 수도경찰청장 김태선은 “각 동단위로 민보단을 조직케 하였는데, 그 임무는 ... 셋째로는 장래 유사시에 전 경찰이 돌발사건 진압에 총출동하지 못할 경우에는 내부치안의 전 책임을 부하(負荷)시킬 것을 예상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민보단 역시 향보단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를 일으켜 비판을 받게 되었고 결국 1950년 3월 11일 비판을 견디지 못한 이승만은 어쩔 수 없이 민보단 해산을 발표했다.

고양지역에서도 5․10 선거를 중심으로 대립과 갈등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나 아직까지 구체적인 사례를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

고양지역의 민보단은 대단히 강력한 대중조직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자료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주민들은 민보단 출신이었다. 고양지역 민보단장은 한영수였으며, 단원은 성기창, 허숙, 조병세, 조병태, 이광희, 이근용, 이은칠, 강흥환, 양재남, 피원용, 박종철, 김금룡, 김영조, 최우용, 엄진섭, 최만현 등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대한청년단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한 후 남한지역 대부분의 좌익활동은 이승만 정부의 탄압으로 서서히 소멸되어 갔다.

이승만 정부는 정부 수립 직후 권력기반 강화를 위해 1948년 10월 4일 우익청년단체를 모두 결집시켜 준군사조직의 성격을 가진 대한청년단을 설립하였다. 간부들은 정부 요인들로 채워졌으며 단원은 2백 만 명에 달했다.

이와 함께 1948년 11월 30일 오늘날의 예비군에 해당하는 호국군이 창설되 었다. 호국군은 국군 조직법 제12조 “육군은 정규군과 호국군으로 조직한다”는 조항에 따라 창설되어, 1949년 8월 31일 해체되었다. 호국군은 전형적인 예비군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청년방위대는 호국군이 해체된 후인 1949년 11월 초 대한청년단을 주축으로 창설되었다.

이 외에 당시 고양지역에서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 우익 관변 단체로 대한청년단,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등이 있었다. 대한청년단은 남부단부와 서부단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단부별로 각 단원이 200여 명씩 400여 명이었다. 대한청년단 서부단부는 일산, 송포, 중면, 원당 지역을 관할하였으며 남부단부는 신도, 화전, 벽제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대한청년단은 단부별로 두 달에 한 번씩 전체회의를 소집하여 강습과 훈련을 했다고 한다. 대한청년단 신도특별단부는 용두리가 1중대(대장 이상빈), 화전․덕은리가 2중대(대장 공은억), 현천리가 3중대였다고 한다.

자료와 구술에서 확인되는 당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고양시사』에 실린 이건현의 증언에 따르면, 남부단장은 정봉현, 감찰과장 김갑규, 감찰부단장 정순형, 성석리 단장은 김순태, 지영리 단장은 이창엽, 문봉리 단장은 안효직이었다. 벽제면의 대한청년단장은 최웅호였고, 송포면에서는 이준영, 최성, 최순이 대한청년단 활동을 하였다. 신도면에서는 이상빈, 정복돌, 장기업, 공은억이 대한청년단 활동을 했다. 중면에서는 김남식(대한청년단 고양군단장), 이경하(후원회장), 이학동, 이병학, 이계득, 이은칠, 피원용, 이진, 강흥환, 강금로, 김봉준, 경문현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지도면에서는 신평리 대한청년단장 최차성이 확인된다.

한편, 고양지역에서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저항활동이 활발했음이 확인된다.

『좌익사건실록 제5권』에서 송포면 덕이리와 법곶리에서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활동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48년 9월 초순 중면 일산리 농민회관 창고 앞 광장에서 영화상영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김진성 등이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유인물 수백 매를 제작해 배포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여러 자료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이에 반대하던 활동이 확인된다. 1948년 10월경 남로당 고양군 책임자는 이용운(당시 23년)이었으며, 부책임자는 권병선(당시 27년), 노력인민부 책임자는 유천(당시 28년), 농민부장은 정진규(당시 28년), 중면 책임자는 김학수(당시 27년, 중면 일산리 605), 선전부 기술부원 박이용(당시 31년), 조직부 책임자 김용문(당시 23년), 신도, 지도, 송포, 원당, 중면, 벽제지구 책임자 박병필(당시 26년), 은평면 책임자 이태양(당시 25년), 구산리 세포원 김희인(당시 31년), 재정책임자 김응규(당시 30년), 인민군 고양군 중대장 이치관(당시 23년), 책임자 이영구(당시 32년), 군당 선전부원 황인철(당시 27년), 은평면당 세포책임자 김형선(당시 39년), 역촌리 세포원 김수명(당시 29년), 중면 일산리 세포원 이종한(당시 24년)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1948년 11월경 주로 한 활동은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유인물 배포, 인민공화국 국기 게양하기, 봉화 올리기, 대한민국 반대 미군철퇴 벽보 붙이기였다고 한다. 당시 이들의 슬로건은 “미곡매상 결사반대”, “소(蘇)군 나갔다, 미군도 나가라”, “조소(朝蘇)인민 친선만세”, “남조선 정부를 결사분쇄”, “여수 순천 인민학살 반대”였다고 하는데, 특히 “여수, 순천 인민학살 반대”를 주장한 것으로 보아 고양지역에서도 1948년 10월 국군 14연대의 봉기로 발생 했던 여순사건으로부터 일정한 영향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당면에서는 장윤기, 이원화, 장석재, 박설원, 박상근이 활동했다. 송포면 덕이리에서는 안진노, 김진성, 최상윤, 임상균, 안광노, 최대경, 최락철, 임상환, 임상만 등이 활동했으며, 송포면 법곶리에서는 이달형, 이기용, 김봉경, 김형섭, 이명조, 심봉식 등이 활동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일자나 내용은 확인되지 않으나 고양지역 곳곳에서 갈등이 있었음도 확인된다.

신도면 용두리에는 서울에 있는 양정중학교와 배재중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4명이 좌익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집안이 모두 괄시 당했으며, 용두리의 우익청년들이 좌익마을이라는 이유로 이웃하여 있는 은평면 구산리의 주민들에게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대한청년단은 좌익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여 처단했는데, 대자1리 고골에 사는 대한청년단 조연택은 전쟁 전에 좌익 공산주의자들을 동네 방앗간에서 데리고 나와 때려 죽인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각 마을마다 토지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징용을 둘러싼 갈등도 있었음이 확인되나 심각한 수준에는 이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고양지역에서도 국민보도연맹이 조직되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21일 “대한민국 정부를 절대지지”, “북한 괴뢰정부를 절대 반대 타도”를 목적으로 결성되었으며 같은 해 6월 5일 ‘국민보도연맹 결성총회’가 개최되었다.
국민보도연맹 조직에 대한 기본 발상은 법률에서도 찾을 수 있다. 1949년 12월 전면 개정된 국가보안법은 “피고인에 대하여 형의 선고를 유예하는 동시에 피고인을 보도구금에 부할 수 있다.”(제12조) “보도구금에 부한 자는 보도소에 수용한다.”(제14조), “보도소의 수용기간은 2년으로 한다. 단, 특히 계속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때는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법원의 결정으로 갱신할 수 있다.”(제15조) “일시형무소를 보도소에 대용할 수 있다.”(부칙 13조)라고 하였다.
경기도지역 국민보도연맹을 담당한 책임자는 오제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관련하여 2005년 6월 선우종원은 “최고 지도위원은 오제도, 김준연, 양우정(연합신문 사장)이었다. … 나는 전라도 지역을 담당했다. 오제도가 서울, 경기지역을 맡은 것으로 기억한다”라고 하였다. 박우천은 경기도에서 1만명이 가입했다고 밝힌 바 있다.
국민보도연맹 경기도연맹은 1949년 11월 4일 결성되었는데, 국토통일원 조사연구실에서 발간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에서 고양지역에서 좌익운동탈퇴선언을 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한 주민들이 확인되며, 증언 속에서도 법곶리, 내유리, 성사리, 일산리 등에서 국민보도연맹 조직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내유리의 희생자 김상국, 김호연 등과 법곶리의 7명 희생자들이 보도연맹원이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것은 비료를 받기 위한 것이거나 얼굴을 알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가입한 것이라고 하였다.
태극단원 이순창은 “당시 마을에서는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일부는 사전에 알고 가입했지만 무지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에서 온 원조물량을 배급받기 위해 구장에게 도장을 건네준 것이 화근이 되어 보도연맹에 가입한 것으로 되어버린 경우도 많았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자료를 통해 고양지역에서 국민보도연맹원이었던 것으로 판단되는 주민들도 있었다. 벽제면 선유리 성호천(당시 28년)은 1949년 12월 초순경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고 한다. 중면 일산리 조병세는 전평 활동을 이유로 가맹했다가 1950년 6월 15일 탈맹했다고 한다.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우익 청년들에게 매를 맞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고 하며 1950년 5월경 탈맹할 때 돈을 냈다는 기록이 있다.

2. 이승만정부의 대응

전쟁 발발 후 이승만 정부에서 보여 준 가장 빠른 조치는 1950년 6월 25일 오후 2시경 내무부 치안국에서 전국 도 경찰국에 보낸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으로 확인된다. 이 문서는 전국 요시찰인 전원을 즉시 구속과 형무소 경비 강화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승만은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1950년 6월 25일 아침 10시경 간담회 성격의 임시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면 남침인지 국지적 무력충돌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산회했다. 이어 오후 2시 비상 국무회의를 속개하여 채병덕 참모총장으로부터 전황을 보고 받았으나 아무런 결정 사항 없이 3시 30분 산회했다. 그러나 중대한 음모는 진행되고 있었다.

26일 아침 8시 신성모 국방장관은 방송을 통해 ‘국군이 인민군을 물리치고 북진 중에 있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으며, 27일 새벽 대통령이 빠진 비상 국무회의는 정부의 수원 이동을 결정했다.

이로보아 전쟁 발발 후 이승만 대통령이 가장 먼저 보여준 행동은 ‘반정부세력 처단’과 ‘도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도피’ 후 가장 먼저 한 행동은 6월 27일 밤 10시경 ‘국군이 이기고 있다’는 거짓 방송이었다.

이어 바로 인민군 점령지역에서의 발생하게 될 인민군 협조자 처벌과 관련된 법률인 「비상조치령」을 1950년 6월 28일 공포했다. 이와 같은 날 ‘국민보도연맹 사건’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했어야 할 행동인 ‘계엄령 선포’는 1950년 7월 8일 있었다. 「계엄법」에 의해 계엄령이 선포될 경우에는 최소한의 인권보호와 권한남용 방지를 위한 안전장치, 즉 형벌을 특별히 가중하지 않고, 증거재판주의에 대한 예외를 인정하지 않으며, 재심 요구권 등이 지켜져야 했다. 따라서 계엄령 선포보다 대통령 긴급명령을 먼저 공포한 것은 국가 위기 사태를 맞아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총체적 대응을 미루어 둔 채, 법치주의를 지키려는 의지 없이 ‘정치적 반대세력 제거 조치’를 가장 먼저 제도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음으로 이승만 정부가 시작한 일은 피난이었다.

6․25 당일 이승만 대통령은 수도를 대전으로 이전하는 문제에 대해 무초 미국 대사와 상의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5일 오후 9시경 무초(Muccio)에게 “내가 공산군 손에 들어가게 되면 한국이라는 나라가 곤란하게 되고, 방어능력이 이러하다 보니 내가 서울을 빠져 나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다. 당시 국군은 목숨을 걸고 전선을 사수하고 있었고, 국회에서는 26일 서울 사수 결의를 논의하는 본회의가 열리던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26일 밤 10시 30분경 동경의 맥아더에게 “당신네들이 빨리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면, 여기 한국에 있는 미국인을 우리가 다 죽이겠소”라는 말을 전하고, 27일 새벽 2시경 국회 요인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비밀스럽게 서울을 떠났다. 당시 은행권, 정부의 중요 문서도 그대로 두었으며, 5만명에 이르는 국군들이 한강 이북에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서울시민은 27일까지 “전 국민은 일치 단결하여 침략자를 막아야 합니다”, “국군이 해주를 탈환했습니다”, “미군이 곧 참전할 것이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방송을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부산을 향했으나 주위의 권유로 대구에서 기차를 돌려 대전으로 다시 왔다. 그리고 27일 밤 10시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서울 현지에서 방송하듯 가장하여 ‘국민들은 안심하라, 서울을 사수한다’는 내용의 방송을 수차례 반복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담화문을 통해 인민군의 남침을 격퇴했으나 위기 상황이므로 대통령의 독재적 권한을 강화할 것이며, 시민들의 반정부적 행위 처벌을 강화할 것이라고 하였다. 담화문의 내용은 ‘우리 국군은 분전 감투하면서 이를 격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실패한 북괴는 기회를 노려 다시 대규모로 침공할 것이 명백하니, 거국 일치하여 태세를 강화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 대통령은 권한을 증대하고, 국회는 정부에 적극 협조할 것이며, 국민들은 한층 더 악질 적색분자를 경계하고, 경찰은 전력을 다해 이를 색출해야 할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그 뒤 28일 새벽 2시 30분 채병덕 참모총장의 명령을 받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은 한강다리를 폭파했다. 당시 한강다리 위에는 수많은 피난민들이 있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 확인되는 희생자들은 중부경찰서 경찰관들이었다. 실제 민간 피난민들은 한강다리를 건널 수 없어 경인철교 밑의 부교로 건너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파괴된 것은 한강인도교였을 뿐 2개의 한강철교는 폭파되지 않았다.


3. 시민의 대응

시민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단 피난을 준비하였으나 대부분 멀리가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피난을 한 경우에도 인적이 드문 가까운 산골로 피신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144만 6천명의 서울시민 가운데 약 40만 명이 인민군 점령 전에 피난했는데, 그 중 80%가 월남한 이북 출신이었고 나머지 20%인 8만 명이 정부고관․우익정객․자유주의자․군인․경찰의 가족이었다고 한다.

피난하지 못했던 사정은 국회의원들도 같았다. 당시 국회의원 210명 중 148명이 남하하고 나머지 62명은 피난하지 못했는데, 여러 의원들이 서울을 탈출하지 못한 이유는 국회에서 27일 새벽 만장일치로 수도 사수 결의를 한데다가 행정부가 입법부에는 따로 통고도 하지 않은 채 수도를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 대해 여운홍 의원은 “내가 피난을 못 간 것은 이 결의안과 이승만박사의 녹음방송 때문이에요.”라고 하였다.

27일 새벽 6시에 중앙방송은 이승만 정부가 수원으로 이동했다고 보도하여 시민들이 크게 놀랐으나, 27일 밤 10시부터 11시까지 3차례에 걸친 대통령의 녹음방송을 듣고 안심하였다. 방송의 주요 내용은 “UN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이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공중수송으로 무기와 물자를 날아와서 우리를 도우니까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송이 이날 정오에 공보처에서 발표한 “정부는 수원이동을 중지하고 중앙청에서 근무 중”이라는 보도에 이어 방송됨으로써 100만 시민이 결정적인 순간에 피난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반면, 인민군의 전면공격이 개시되자 이를 막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경찰, 군, 정부의 고위관료 상당수는 피난민들의 발을 묶은 채 본인들만 피난길을 떠났다 이에 대해 미공군 한국담당 정보장교 도널드 니콜스(Donald Nichols)는 그의 책에서 당시 서울시민들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 “남한 국립경찰, 서울시경, 군과 정부관리들은 약삭빠른 고양이처럼 그들의 지위와 책임감, 그리고 가족을 두고 떠났다.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시민들은 그들의 보호자로부터 버림받고 침략 적군의 무자비한 지배아래 가장 잔인한 고통을 당했다.“라고 쓰고 있다.

4. 인민군 점령기의 고양

1) 인민군의 점령 정책

인민군의 남한 점령정책은 1946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발표한 20개 정강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강의 주요 내용은 일제 잔재의 청산, 우익정당 및 우익인사의 정치활동 금지, 인민위원회 구성, 은행 등 공공적 성격의 기업 국유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의무교육 실시, 단일 세금제도 실시 등이었다.

이러한 정책방향에 따라 남한의 점령지역에서는 노동당 및 각종 대중단체를 복구하였으며, 행정기관으로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고 토지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와 함께 물적․인적으로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각종 사업과 의용군 모집이 시도되었다.

<인민위원회 구성>

1948년 9월 8일 승인된 북한 헌법 제5장 제68조에 의하면, 각 인민위원회는 도․시․군․면․리․에 있어서 국가주권의 지방기관이었다. 제74조에 규정된 인민위원회의 임무는 국민의 주권 및 소유권을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며, 상급기관이 공포한 법령․정령․결정․지시 등을 실행하며, 조세업무 및 예산 편성․실행을 담당하며, 교육․문화사업을 감독하며, 보건업무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민위원회는 각 지방에서의 최고 행정기관이었다.

인민군측은 점령 직후인 1950년 7월 5일 먼저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고양지역의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된 사실은 신도면 용두리에서 확인된다. 신도면 용두리(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에서는 1950년 7월 5일 300여 명의 부락민이 참가하여 용두리 공립국민학교에서 용두리 인민위원회가 열려 8명의 용두리 인민위원회 위원장 및 위원이 선출되었다. 같은 날 용두리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원승희가 선출되었다. 한편, 신도면 진관내리에서는 7월 15일 인민위원회 선거가 있었다. 중면 일산리 임시인민위원회는 위원장 이성희, 부위원장 최만복, 서기장은 서병덕이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고양지역의 임시인민위원회는 20일까지 선거관리 조직을 준비했으며, 24일까지 유권자등록사업을 마감했다. 25일부터 27일까지 95개리에서, 29일까지 9개면에서 인민위원회 선거가 치러졌으며, 30일에는 군 인민위원회 선거가 치러졌다. 고양군 인민위원회 선거에서는 41명의 군 인민위원이 당선되었으며, 이어 제1회 고양군 인민위원회를 개최하고 이경구, 박종대, 최영욱, 김성진, 조순행, 김길수, 오국섭, 김준만, 유준영 등 9명의 상무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들은 다시 제1회 상무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이경구를 고양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겸 제1부위원장으로, 박종대를 제2부위원장으로, 최영욱을 서기장으로 각각 선출하였다. 전체 인민위원회 선거결과 당선자 549명이었으며 그 중 노동자가 82명, 농민이 422명, 사무원이 17명, 상인이 2명, 기업가가 1명, 기타가 24명이었다.

유권자가 750명인 고양군 용두리에서의 리인민위원회 위원선거는 25일 예정보다 1시간 반 앞당겨진 오전 5시 30분 용두리 임시인민위원장 진강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되었다. 먼저 선거에 관한 사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임칠성이 추천한 진강렬, 송복쇠, 김복한, 리조근, 박정운의 5명을 선정하고, 입후보자로는 진강렬, 송복석, 임해성 리조근, 은경택, 김복한, 리홍우의 7명의 추천이 있었다. 투표 결과 원경택이 위원장에, 김복한이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벽제면 대자리의 경우는 우익 성향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야 마을 주민들이 시달림을 덜 받을 것으로 판단하고 우익 성향의 주민인 김정부, 권상용을 인민위원장으로 추천하여 인민위원회를 구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중면 마두리에서는 최의현이 과거 8․15 직후 약 1년간 중면 마두리 대동청년단장을 하다가 사임하고 그 후 서울에서 상업을 하다가 귀향한 사람이므로 우익 인사로서 동민을 위할 것이고 대동청년단 명부에도 삭제된 사람이므로 마을 주민 전부가 신임하고 위원장에 선출한 것이라고 한다.

자료와 증언을 종합하면 당시 인민위원회 간부로 선출된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 고양군 인민위원장 이경구, 벽제면 인민위원장 이재선, 면 인민위원회 서기 김현룡, 고양리 인민위원장 신광영, 송포면 인민위원장 박기섭, 구산리 인민위원장  피순성, 신도면 인민위원장 진광열, 진관내리 인민위원회 서기장 최창설, 용두리 인민위원장 원경택(또는 진성운), 용두리 인민위원회 서기장 김복환, 화전리 인민위원장 황재덕, 현천리 인민위원장 황뢰성, 원당면 인민위원장 한춘식, 면 인민위원회 토지개혁위원장 장기만, 은평면 인민위원장 김은규, 수색리 인민위원장 황용문, 중면 마두리 인민위원장 최의현, 일산리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병문, 서기장 강금로, 지도면 인민위원장 김준만, 지도면 행주외리 인민위원장 이창영, 지도면 오금리 인민위원장 김노마, 파주 산남리 인민위원장 오내기 등이다.

인민위원회의 주요 사업은 토지개혁, 폭격으로 인한 도로 복구공사, 의용군 출동, 현물세 제정사업 등이었으며, 때때로 군량미를 수송하고 배급하기도 했다.

<사회단체의 조직>

북한 당국은 노동당과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다양한 대중적 사회단체를 조직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단체는 민주청년동맹(민청)이었다. 민청 활동은 주로 선전이었는데, 의용군 모집의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인민군에게 물자를 원조하라는 벽보를 붙이거나 문맹자에 대해 조사했다. 민청 소속의 젊은 청년들은 부락경비에 동원되기도 했다.

민주여성동맹은 주로 부식물 모으기 등 전쟁물자 지원사업을 했다고 하며, 농촌위원회는 토지개혁을 수행했다. 대체로 이들의 역할은 인민위원회의 활동을 실질적으로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와 증언에서 나타나는 사회단체 인사들은 벽제면 면 민청조직부장 고양리 박윤덕, 내유리 민청위원장 김상완, 송포면 대화리 내촌부락 민청위원장 김형장, 송포면 민청위원장 안진노, 신도면 현천리 농민위원장 황온순, 원당면 성사리 민청위원장 장기○, 성사리 자위대 대장 이철수, 중면 민청위원장 한창수, 중면 일산리 자위대장 조병세, 일산리 민청위원장 피원용, 중면 풍리 민청위원장 이계득, 중면 마두리 민청위원장 전대봉, 부위원장 차기원, 중면 마두리 자위대장 서임봉 등이다.

<토지 개혁>

1949년 6월 22일 이승만정부의 농지개혁이 있었는데,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원칙으로 하여 부재지주의 토지를 확인,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1950년 7월 4일 북한은 최고인민위원회에서 「조선 남반부지역에 토지개혁을 실시함에 관한 정령」을 발표하였다. 주요 내용은 “무상몰수․무상분배의 원칙(제1조), 20정보까지 자작농 허용(제2조), 농민 총회에서 토지 분배 방법 결정(제4조), 현물세 납부(제6조), 리 단위 7~9명의 농촌위원회 조직(제8조)” 등 이다. 위 정령에 따르면, 몰수토지의 대상은 ①미국과 이승만 정부 소유의 토지, ②5정보 이상 또는 (면적과 상관없이) 계속 소작을 주는 토지였다. 토지 분배는 고용농민, 토지 없는 농민, 토지 적은 농민들에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북한은 점령지역의 토지개혁을 주관할 토지개혁 지도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이들은 1950년 7월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7월 16일에는 경기도에서 토지개혁을 실행할 책임자를 정하여, 7월 17일과 18일 이틀 동안 교육을 실시하였다. 토지개혁 실행위원회 책임자와 농민대표를 교육시킨 후 토지개혁 지도위원들은 7월 19일부터 남한 각 지역으로 파견되어 토지개혁을 지도하였으며, 경기도에서의 토지개혁이 8월 10일 완료되었다고 발표했다.

기록에 따르면, 모든 농지는 농민동맹위원장의 주관 아래 고루 분배되었는데, 제1차로 착수한 토지개혁은 7월 16일경부터 8월 15일까지 완료했다고 하며, 다음으로 작황면적 즉 수확면적 및 수확예상고를 조사한 후 농민으로서 상중하농에서 1곡 내지 2곡으로 현물세 판정위원을 선출하고 현물세로서 논은 수확예상고의 2할 7부, 토지는 2할 3부로서 조정하여 현물세 징수에 노력, 기준을 완성하였다. 그 외에 의용군 적령자로서 17세 이상 60세까지 남녀 해당 조사를 완료 보고하는 등 리 인민위원회의 임무완성에 사실상 노력하였다고 한다.

농촌위원회는 고용농민, 토지 없는 농민, 토지 적은 농민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농촌총회에서 공개적 거수방법에 의해 추천되어 뽑힌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위원의 수는 5~9명이었고, 시․면 인민위원회의 승인아래 토지개혁 업무를 수행하였다. 농촌위원회의 임무는 ①몰수될 토지 조사통계와 면적 확정, ②분배받을 농민관련 조사통계, ③농민총회 소집 후 분배면적과 절차 심의 결정, ④시․면 인민위원회 비준 후 토지분배 실시, ⑤토지소유권증명서 발급 배부하는 것이었다.

고양지역의 토지개혁과 관련하여 이북 측 언론은, 1950년 7월 18일 토지개혁실행위원회가 조직되어 8월 9일 토지개혁실시를 완료할 예정이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의용군 동원>

당시 치열한 전투로 인해 남북 모두 전투병력을 충원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1950년 7월 1일, 「인민의용군을 조직할데 대하여」라는 군사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남한에 인민의용군을 조직할 방침에 제시되었고 그에 따라 의용군 모집이 본격화되었다. 의용군 모집 방침에서는 만18세 이상 노동자, 빈농, 청년학생들을 주요 모집대상으로 규정했다.

인민군 점령시기에 있었던 의용군 징집에 대해 학계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서울․경기․강원․충남북․전남북․경남북 일부 등 인민군 점령 아래에 들어갔던 지역에서 약 60만 명이 의용군으로 징집되었다고 한다.

의용군 동원은 남한 주민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남긴 점령정책으로 고양지역에서도 많은 피해를 남겼을 것이나 구체적인 피해 규모는 파악되지 않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이승만 정부가 의용군으로 강제동원 당한 것 자체가 큰 부역행위의 하나로 보았으므로 쉽게 그 사실을 말하려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이 문제는 상당히 모순되는 결과를 낳았다.

먼저 의용군의 성격에서 그 모순을 찾을 수 있다. 의용군은 정식 군대인 인민군과 구분되었다. 정식으로 무기를 지급받은 것도 아니면서 전투현장에 투입되었으므로 소모품처럼 여겼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이다. 반면, 이승만 정부는 이들을 전투원으로 여겼으므로 극형의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초기 의용군 동원은 자발성의 형식을 빌었으나 실제로는 암묵적 강압이 있었다. 특히 배신자로 취급되었던 국민보도연맹원 출신들은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의용군으로 참여한 경우가 많았다.

1950년 8월경 의용군 동원은 강제동원의 성격이 강해졌으며, 대한청년단 등 우익청년들에 대한 징벌적 성격도 더해졌다. 이들 우익청년들은 의용군을 갈 것인지 아니면 자위대에 남을 것인지 양자택일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자위대에 남으면 부역자 소리를 들을지언정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의용군으로 갔다가 탈출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인민군 점령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의용군에 강제 징집당한 청년들 중 상당수가 도중에 탈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 청년들은 마을에 돌아 와서도 숨어 지내야 했는데, 국군 수복 전 발각되어 내무서 등에 의해 집단희생된 경우도 있었으며, 9․28 수복 후 부역자라며 국군에 의해 희생당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전투 현장에까지 동원된 청년들 중에는 유엔군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다가 석방되어 귀환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부역혐의로 경찰에 연행되어 실형을 받은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다시 국군으로 입대했다.

국군 수복 후 의용군에 강제징집 당했던 주민이 있던 집안의 나머지 가족들 상당수가 부역자의 가족이라고 하여 희생당하거나 감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인민재판 등에 의한 피해>

① 우익인사에 대한 보복 피해

인민군 점령 초기 우익인사에 대한 보복이 있었다. 인민군이 고양지역을 점령하자 전쟁 전 이승만 정부와 그의 지휘하에 있던 우익청년단체에 의해 억압을 당하던 국민보도연맹 등 좌익단체 출신 인사들이 보복에 나섰다고 한다.

인민군의 점령 초기 인민군의 점령정책에 반대하던 인사들이 희생당한 일이 있었는데 원당면장, 원당지서장 등 일부 공무원이 피난을 가지 못하여 인민군 측에게 희생당하기도 하였으며 경찰관들이 내무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인민군 점령 초기, 대한청년단 간부들이 인민군 측에 의해 연행되었다. 중면 일산리 이계득은 대한청년단 간부였다는 이유로 1950년 7월 8일경에 한청 총무계장, 조직계장, 감찰계장과 함께 내무서에 체포되었으며, 이계득을 제외한 3인은 석방하고 이계득은 3주일 동안 구속당했다고 한다. 대한청년단 남부단장은 정봉현, 감찰과장 김갑규, 감찰부단장 정순형, 단원 조대흥이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이송되어 납북되었다고 한다.

벽제면 선유리 안재호는 6․25 전쟁 전 대한청년단 선유리분단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던 중 인민군이 고양군을 점령하자 1950년 7월 22일 벽제면 자위대원에 의해 벽제 내무서로 끌려가 내무서 유치장에 구속되었다가 7월 25일 서울시 남산 밑에 있는 고양내무서 본부로 가서 ‘대한청년단에서 활동하던 반동분자가 의용군 출정을 반대했다.’라는 이유로 취조를 당하였으나 그 후 별 이상 없이 동월 27일 오후 5시경 석방되어 집으로 귀가했다고 한다.

벽제면 선유리 이선백은 전쟁 전 선유리 구장으로 있었던 이유로 면 내무서에 구속 취조를 당한 사실이 있었다. 이선백은 면 자위대장 노원쇠(盧元釗, 당시 25년 가량)로부터 농민조합에도 가입치 않고 인민공화국 정치를 반대하는 역도배라고 하며 전신을 구타당하였고 구금되었던 10여 일동안 매일 신문을 당한 사실이 있다. 1950년 8월 2일 오전 11시경 석방을 시키며 여하튼 귀가하여 인민공화국에 충성을 다하라고 연설하며 나가서 잘하여 달라고 하므로 할 수 없이 서약을 하고 나와서 신도면 동산리에 가서 피난하였다. 구속당한 장소는 고양군 벽제면 고양리 번지불상 벽제면 내무서 유치장이었다고 한다.

② 인민재판에 의한 피해

인민군 점령 당시 인민재판이 있었던 사실은 판결문 자료를 통해 확인된다. 당시의 수사기록이 극심한 공포 상황에서 작성되었던 사정을 감안할 때 사건 경위와 원인에 왜곡이 있을 수 있으나 인민재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1950년 8월 15일 오전 6시경 당 세포사무실로 쓰인 장순득의 집 바깥채에서 인민재판관 김광현의 주도하에 주민 100여 명이 모여 인민재판을 열어 주민 이상식을 숙청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때 사정을 모르고 참가하였던 한민당원 원봉택을 발견하자 진석순이 “이 놈도 반동분자”라고 하여 결국 두 사람이 난타당한 후 숨져 중촌부락 하천에 매장당하였다. 같은 날 오후 2시 경 세포위원장인 진만종이 원천만에게 지시하여 “반동분자를 상부의 지시 없이 숙청한 이유”를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③ 인민군 후퇴기 피해

인민군 측에 의해 발생한 인명피해의 대부분은 인민군 후퇴 시기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북한 노동당은 “유엔군 상륙시 지주가 될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에 대한 지시”를 각 지역당에 내리면서부터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시기 대표적인 집단희생사건으로 국군 수복을 준비하던 태극단원들이 송포면 덕이리 은장에서 희생당한 사건이 알려져 있으며, 같은 시기 성석리 김씨 집안 등 15명이 희생당한 사건, 벽제면 오금리 주민 13명과 피난민 5명이 함께 희생당한 사건이 있다.

<은장 태극단 희생사건>

태극단은 인민군 점령아래에서 열차탈선, 전단 살포, 통신선 절단, 인민의용군 탈출 방조 등 비군사활동을 하다가 인천상륙작전 등 유엔군의 반격시기를 전후하여 인민위원회 간부 암살, 후퇴하는 인민군 공격 등의 준군사 및 군사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50년 9월 15일 단원 이응복이 북한 보안대원에게 발각되어 총살되었고 20일경에는 단원 이병렬이 체포된 후에 시체로 발견되는 참변이 이어졌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고 유엔군과 인민군의 전선이 경기도까지 올라오는 상황에서 ‘태극단 희생사건’이 발생했다. 발단은 9월 28일 의용군에서 도망 나와 수수밭에 숨어있던 구산리 태극단원 이태영, 이두영 형제가 결전이 있을 것이라면서 집에서 총을 닦던 중 집 머슴의 신고로 붙들리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고양군 중면과 송포면, 파주 산남리의 태극단원 38명이 덕이리 은장 등에서 희생당하게 되었다.

당시 송포면 덕이리 은장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난 이준영은 “일곱명씩. 주욱 뒤에 세워 놓고서 뒷동산에서 총살하는 거예요. 산남으로 들어가는 이발소가 있는데 이발소가 사무실이라고. 거기다 총살을 시키는데. 어 정말 못 견디겠어. 벌벌 떨리고 그러는데. 먼저 형하고 동생하고 총살하고. 음력 8월 17일 일거예요. 15일이 명절이니까 명절 쇠고 이틀 있다가 처형당했으니까. 잡혀간 때는 그 날 17일에 잡혀가지고 그 날 돌아 가신거야.”라고 증언하였다.

태극단투쟁사에는 1950년 9월 20일경 송포지단 11명, 산남지단 13명, 청석지단 4명, 본단 10명 등 모두 38명이 송포면 덕이리 은장에서 희생되었으며, 금촌지단 태극단원들은 9․28 수복하는 국군을 맞이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태극기 500매와 엠1 등 무기가 발각되면서 6명이 금촌내무서로 끌려가 희생당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들 외에도 태극단 활동 중 사망한 단원은 1950년 8월 초 행주나루터 백미운송선 습격사건에서 전사한 한기성, 김재덕, 이성운, 손기성, 임용식 등 수색지단원 5명이 있으며, 1950년 9월 19일 정발산 공격에서 전사한 백마지단 이승환이 있다고 한다.

한편, 송포면 덕이리 은장에서 희생된 태극단원을 직접 학살한 자의 신원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시 현장에서 학살 직전 내무서 일을 돕던 친구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다는 이준영의 증언으로 보아 1950년 9월 28일 희생당한 태극단원들은 당시까지 월북 도피하지 않고 있던 내무서원에 의해 연행되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9월 20일 이후 고양지역의 치안이 공백상태였고 능곡지역이 이미 수복되었으므로 당시까지 어떤 내무서원들이 남아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사건발생일이 동일한 강화 인화리 사건의 경우로 보아 이들이 국군 정보부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이는데 이는 다음에서 살펴 볼 고양경찰서 뒷산 희생사건, 오금리 타공결사대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고양경찰서 뒷산 희생사건>

벽제면 성석리 안골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마을로 두개 파의 김해 김씨가 대성을 이루며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두개 파 김해 김씨는 김현모 집안의 5형제와 김현수 집안의 5형제로 아주 가깝게 지냈다.

8․15 해방이 되고 벽제면에는 대동청년단이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며, 한편 안골에서는 김현모가 식사리에 있던 서당 훈장 한춘식과 연락하며 반정부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인민군이 고양지역을 점령하자 훈장 한춘식이 원당면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되고 김현모는 벽제면 인민위원회 선전부장 직책을 맡게 되었다.

김현모의 활동 또는 귀일안골의 지형 특성과 어떤 관련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인민군 점령기 성석리 안골은 많은 우익 인사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그런데, 인민군 후퇴기를 당해 안골 주민들의 상황은 크게 변하게 되었다. 9월 20일경 유엔군이 능곡에 진출하자 김현모 집안의 일부 인사들은 월북 피신하였고, 성석리 인근에는 후퇴하는 인민군과 빨치산으로 보이는 낯선 사람들이 드나들게 되었다.

김현수 집안 인사들은 유엔군이 진주한 능곡지역으로 피신하려고 했으나 9월 26일경 빨치산으로 추정되는 자들에게 연행되어 당시 고양경찰서 뒷산(현 복지관 터)에서 총살당했다. 시신은 국군 수복 직후 발굴하여 안장하였는데, 당시 시신은 철사에 팔을 묶인 채 총상을 당한 상태로 얕게 매장되어 있었으며, 그 밑으로 다른 주민들의 시신이 있었다. 당시 희생된 성석리 김씨 집안 인사들은 김현수, 김현주, 김순배, 김한배, 김경배, 김현배, 김홍배, 김용희 등 8명인데, 이 시기 희생당한 중면의 주민들도 이때 함께 희생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에 일산리 오흥석이 인민군 점령기 내무서 활동의 하나로 벽제면 성석리에 사람을 체포하러 간 사실이 있었다고 하며, 일산리 주민 이창훈은 인민군 점령기 성석리 안골 김준배 사랑에 피신하던 중 “고양내무서 벽제분주소장, 자위대 및 빨치산”에 의해 피검되었으나 당시 일산리 자위대장이었던 조병세에 의해 풀려난 적이 있었다고 하였다. 9․28 수복 후 고양경찰서 의용경찰대원이 된 오흥석은 이 소문이 성석리 주민 김현구가 개인 감정으로 중상을 한 것이라며 부인 한 바 있다. 이들의 증언으로 보아 1950년 9월 26일경 있었던 이 사건의 직접 가해자들은 확인되지 않으나 인민군 측 내무서의 지시를 받던 조병세, 오흥석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9월 20일 능곡지역 수복을 시작으로 28일 고양지역이 완전히 수복된 상황과 중요한 부역행위자들이 이미 월북했다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사건의 직접 가해자가 누구였는지 정확히 밝힐 필요가 있으나 아직까지 증언이나 자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벽제면 오금리 치안대 희생사건>

1950년 9월 20일경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마을 치안에 공백이 생기자 벽제면 오금리 주민들은 스스로 치안대를 만들어 마을을 지키게 되었다. 그러던 9월 30일 아군복을 입고 대한타공결사대라고 소개한 청년들이 인민군 패잔병을 잡으러 가자며 오금리 주민들에게 협조를 요청하자 14명의 마을 청년들이 이들을 따라나서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인민군 패잔병이 숨어 있다는 장소에 도착하자 숨어 있던 신원불명의 청년들에게 잡히어 움막에 갇히게 되었다. 얼마 후 서울에서 피난 왔다는 5명의 주민들도 따로 잡혀 왔다.
다음 날 10월 1일 밤이 되자 타공결사대라고 자칭한 자들이 18명을 뒷산 토굴로 끌고 나와 총과 창으로 살해하였다. 오금리 주민 13명이 희생당했으며 이홍오는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생존했다.
주민들을 학살한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증언과 자료가 엇갈린다. 유족 등 일부 주민들은 가해자들이 인민군 측 내무서원들이었다고 하며, 또 다른 주민들은 가해자들이 대한타공결사대라고 한다. 반면, 검찰과 경찰의 자료는 일관되게 대한타공결사대였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희생시기로 보아 이 사건의 가해자는 대한타공결사대원일 가능성이 높지만 앞의 두 사건의 경우처럼 월북 피신하지 않고 남아 있던 내무서원 또는 빨치산 등이 가담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출처,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도서출판 자리, 2011.